1.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에 보면, 소설을 잘 쓰는 비법들이 나온다. 하나만 소개하자면, 킹은 주인공들에게 위기를 던져주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열심히 받아적는다고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받아 적는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오물딱 조물딱 움직여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상황이 전제된 이후에 이들은 논리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작가의 의도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순간,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워진다.
이런 조언은 논문을 쓸 때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다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들이 "우리는 포용정책을 써야 한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미시적인 움직임들을 관찰하기 보다는 한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한국인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의 움직임을 논리적으로 추적하기보다는 작가가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삐걱거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플롯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다. 아니나 다를까, 킹은 "플롯은 신경쓰지 말라"고 조언한다. 스토리를 논리적으로 따라가다보면 플롯이 도출되는 것이지, 플롯에 맞는 글을 쓰려다보면 스토리가 부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개요가 엉망이기 때문에 논문이 별로라는 흔하디 흔한 충고, 과연 사실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요약하자면, 선스토리 후플롯.
2. 비트겐슈타인 좋아하는 지리학자는 많지 않다. 특히 한국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언급하는 지리학자는 거의 보기 힘들다. 외국 지리학자들은 종종 그를 언급하기도 한다. 닐 브레너의 누더기 자본주의론(variegated captialism)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갑자기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의 개념이 튀어나와서 반가웠던 적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 지역 내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족이 유사한 것처럼 공통성을 가진다는 뉘앙스였다(기억에서 꺼낸 내용이라 확실치는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화용론(use theory: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서 온다)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언어가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가장 유명한 예는, "벽돌!" 이라고 했을 때 이것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벽돌을 가져오라", "벽돌이 있다", "지금 벽돌이 필요하다"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 "벽돌"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가족이 닮은 것처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벽돌이라고 했을 때는 크든 작든 네모낳고 단단한 물체를 상상할 가능성이 동그랗고 빨간 사과를 떠올릴 확률보다는 높을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가족유사성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철학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보조개념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지리학자의 인용에 대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란 인간 사고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를 제기한 논리적 사고체계라기보다는, 그냥 "가족유사성"이라는 팬시한 개념 하나를 집어넣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였다. 어떤 글이든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기획은 무시된 채 "가족유사성"이라는 단어만 떠돌아다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은 "철학적 탐구"에서 그가 추론했던, 맥락없이 단어들이 떠다니면서 헛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사고와 놀랍게 닮아있다.
아무튼,
담론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회의하게 된 것은 이 시점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상대가 사고한 흔적들을 모조리 쫓아다니면서 참, 거짓을 따질 능력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불확실한 것들을 배제하고 확실한 것들을 찾아나가는 것 뿐이다. 처음부터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확실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과는 논쟁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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