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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역사문화

김유신과 천관이의 미심쩍은 이별이야기

<동국여지승람>에는 천관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이현군 박사의 "옛 지도를 들고 우리 역사의 수도를 걷다"에서 재인용). 


"(김유신이) 하루는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전일에 다니던 길을 따라 술집여자(원래 표현은 娼女)가 한편으로 반기고 한편으로 원망하여 울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유신이 이것을 깨닫고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갔다. 그 여성의 이름은 천관이며, 그녀가 지은 절이 천관사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신의 미담이다. 어릴 적 술집에 드나들던 김유신은 어머니의 꾸짖음에 정신을 차리고 술집을 끊었다고 한다. 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룸싸롱 죽돌이가 정신차리고 공부한 케이스라고 할까나(앞으로 편의상 술집을 룸싸롱으로 생각해본다. 그러면, 이야기가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도 모르게 말이 자신의 단골의 집 앞으로 데려와 버린 상황이다. 실제 말이 그토록 놀라운 네비게이션 기능을 탑재했는지 약간 의문이지만(술취한 김유신을 친구가 말에 태웠다는 설정도 작위적이다. 술취한 친구를 택시태워본 사람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일단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이야기는 모순 투성인데, 한 두가지만 생각해본다. 먼저, 김유신은 이미 정신차리고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왜 말에서 잠이 들 정도로 과음을 했던 것일까? 물론 김유신이 정신차리고 공부하다가 어쩌다 술을 먹었는데 하필 그 날 천관이네 집으로 말이 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부 열심히 한 날 하필 술이 취했고, 하필 말에서 잠이 들었고, 하필 천관이네 가게로 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여기서 한가지를 알 수 있다. 김유신은 아직 정신차린 상태가 아니었다. 


김유신은 충분히 정신차리지 않은 상태에서 천관이를 "어쨌든" 만나게 된다. 그 다음 목격자는 천관이와 김유신, 그리고 말 뿐이다. 그러나 말은 이미 죽었다. 남은 사람은 천관이와 김유신. 둘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는데, 천관이를 보자마자 김유신이 애꿎은 말을 죽였다? 목 마른 사람이 냉장고 문을 열어 물 대신 간장을 마셨다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여기서 객관적 팩트는 하나이다. 이미 말은 죽고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천관이 때문에 말을 죽였다는 말은 김유신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김유신은 왜 말을 죽여야 했을까? 당시 말 타고 다니는 화랑이었으면, 지금으로 보면 소나타 타고 다니는 대학생 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단골 룸싸롱으로 취한 자신을 데려갔다는 이유로, 어쩌면 너무 보고 싶었을지 모르는 여자 앞에서 대담하게 말을 죽였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다. 자기가 끌고 다니는 소나타를 폐차시킨 것이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현대판으로 생각하면, 소나타가 미워서 처분했다기보다는 소나타에 어떤 심각한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폐차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 


천관이의 향후 행보도 미심쩍다. 왜 천관이는 하필 잘나가는 룸싸롱을 관두고 승려가 되었는가. 김유신이 잘 되기를 바라서 기도하려고 승려가 되었다는 설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유신이 만약 정말로 천관이네 룸싸롱 앞으로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말의 목을 베었다면, 그 자체로 천관이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기 목이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에게 그런 충격을 남자를 위해 평생 기도한다? 오히려 김유신을 평생 저주하는 편이 더 그럴듯한 이야기 같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천관이와 김유신이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애꿎은 말이 죽었다. 과연 그 순간에 정말 김유신과 천관이가 아무 일이 없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김유신이 말을 죽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쿨하게 돌아오면 된다. 그렇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토록 무서워하는 엄마한테도 그냥 비밀로 하면 된다. 김유신이 말을 죽인 것은 상식을 벗어난다. 즉 말의 죽음은, 그 죽음이 아니면 해결되지 못할 중대한 일이 이 둘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일은 천관이가 진로를 바꾸어 비구니가 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도 있다. 천관이를 만난 것을 들킬까봐 무서워 김유신은 말을 죽였다. 실컷 놀다보니 시간이 늦었고, 엄마한테 혼날까봐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엄마, 내가 이 못된 말이 잠든 저를 천관이네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무슨 설화를 가지고 이런 복잡한 분석을 하느냐고 핀잔을 받을 수도 있겠다. 간단히 분석을 하면서 느낀 점은, 설화는 너무 남성중심적이라는 것. 비구니가 된 천관의 입장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