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문화예술평론/영화평

<달콤한 인생>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인생 (2005)

A Bittersweet Life 
9.1
감독
김지운
출연
이병헌, 김영철, 신민아, 김뢰하, 이기영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20 분 | 2005-04-01
다운로드


여러번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는 <달콤한 인생>이 그랬다. 볼 때마다 새롭고, 느낌이 달라서 다시 보게 된다. 언젠가 내가 단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만 리뷰를 써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달콤한 인생>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영화에 대해서 리뷰를 작성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서야 <달콤한 인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할 말이 많은 영화인데. 


"말해봐요..."


ㅇㄹ


영화는 선우(이병헌)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가지를 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채 이렇게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니 마음이다. 


한 손에는 초콜렛을 다른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를 들고 호텔의 창 밖을 너머 선우는 야경을 본다. 처음 나래이션은 두 가지를 암시한다. 


1) 이 영화는 마음에 관한 영화이다. 

2) 그러나 마음이 아닌 다른 것들이 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비교적 단조롭다. 선우는 호텔지배인이다. 이 호텔의 강사장(김영철)은 선우에게 자신의 애인인 희수(신민아)가 애인이 생긴 것 같으니 감시하라고 한다. 선우는 희수가 또래의 애인을 만나는 것을 강사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다시는 애인에게 희수를 만나지 말라고 당부하며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 한다. 그것을 알게 된 강사장은 선우에게 악감정이 있는 백사장(황정민)을 동원하여 선우를 죽이려 한다. 선우는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기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강사장, 백사장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 


자기 누나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어야만 하는 어려운 수수께끼가 담긴 <올드보이>, 자기 형에 대한 복잡한 복수극인 <범죄의 재구성> 등에 비해서 이 영화는 굉장히 단조롭다. 복선은 있지만, 수수께끼는 없다. 어색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스토리는 일정한 속도로 전개된다. 이러한 단조로운 스토리는 화면 자체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예를 들면 이 컷.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태에서 선우가 자신을 쫓아오는 불량배들을 혼내주는 이 장면. 비오는 날 한강대교에서 갑자기 차를 세우고, 양복을 저민다. 이미 이 행동은 선우가 불량배들과 어떤 물리적 충돌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다음 자기를 쫓는 불량배의 차에 가서 차키를 바다에 던지고, 불량배들을 때려눕히고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탄다. 이 때까지만 해도 관객은 잘 알 수 없다. 희수를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저 불량배들과 싸울 일도 없었다는 것을. 



선우는 희수를 살려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강사장에게 희수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운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만약 희수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되면 조폭 출신 강사장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우는 희수가 애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이었을까. 선우는 희수의 부정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희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 강사장은 자신을 키워준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강사장에게 무려 7년동안이나 목숨바쳐 일해왔다. 희수는 그런 강사장의 내연녀이다. 선우는 아마도 희수를 강사장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우가 바로 강사장에게 보고했을 경우 희수마저 생명이 위태로울지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선우의 의도는 다른 누구보다 강사장에 의해서 가장 먼저 간파당한다. 선우가 어떻게 포장을 하든지 그 모든 행위는 결국 '희수를 위한 것'이고, 선우가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면서도 희수의 안전을 챙긴다는 것은 희수에 대한 선우의 특별한 감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강사장은 그것이 연정이라는 것을 매우 쉽게 눈치챈다. 그러고보면, 이 여자(신민아) 비정상적으로 매력적이다. 



몰랐어? 인생은 고통이야. 


백사장(황정민),

 

이 인물은 선우에게 악감정을 가진 인물이다. 초반부터 자기 부하들이 선우에게 얻어맞았고, 선우는 백사장을 '양아치' 취급한다. 그는 거의 악인에 가깝다. 강사장은 백사장을 이용해 선우를 죽이려 한다. 아마 처음부터 강사장은 백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다. 


선우가 가장 먼저 복수를 하러 간 인물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그는 선수다. "선수끼리 왜 그래요?" 하며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선우를 칼로 찔러버린다. 그리고 그 뒤통수에 이런 대사를 날린다.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영화에는 여기저기서 불교와 도교의 냄새가 난다. 실제로 장자의 이야기가 인트로와 에필로그에서 나오기도 하고, 대사 가운데에도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대사가 등장한다. 물론 하아얀 아이스링크라는 색감은 피를 위한 것이다. 


다음 순간, 


선우는 백사장에게 권총을 쏜다. 빵, 소리가 나고 탄피 떨어지는 소리, 백사장의 비명이 동시에 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발의 권총소리가 더 울리고, 하얀 아이스링크 바닥은 빨갛게 물든다. 하얀 얼음 위에 빨간 핏자국, 감독들이 좋아하는 색감이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강사장(김영철)의 처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희수의 바람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는지(이게 가장 노멀한 해석이다), 희수를 응징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약간 무리한 해석), 선우의 충성심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결과론적이지만, 상당히 신빙성 있는 해석). 결과적으로 강사장은 선우에게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 대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명대사이다. 


선우는 울부짖는다.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말해봐요. 7년 동안이나 당신을 위해서 개처럼 일해온 나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대사는 특별한 애착이 간다. 이 대사는 선우의 여러가지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먼저 그는 좀처럼 보스에게 대들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7년이나 강사장 밑에서 일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감정적으로 굉장히 흔들리고 있다. 강사장은 선우가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고, "소란 피우지 말라"고 타이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충성스런 부하가 자신의 애인에게 연민을 품고, 그 연민 때문에 자기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은 강사장으로서도 화나는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는다. 강사장이 느끼는 감정은 오직 그 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감정에 일일히 각주를 달아주지 않는 것,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여백의 미. 



문석(김뢰하)은 이 영화에서 가장 평범한 캐릭터이다.

어쩌면 너무 비현실적일 것 같은 <달콤한 인생>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선우와 강사장이 밥 먹고 있는데 눈치없이 끼어들다가 강사장에게 혼나기도 하고, 백사장과 어울리다가 선우에게 혼나기도 한다. 선우는 따끔하게 문석을 혼낸다. 


"쟤내들 거래 트기 전에 너나 나 정도는 잡고 들어오겠다는 거야. 그런 거 몰라?"


이렇게 망신을 당하던 문석은 나중에 선우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 


가만보믄 사람이 조또 아무것도 아냐. 한치앞도 볼 수 없잖아.


시크한 이 대사야 말로 이 영화의 백미 중에 하나다.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일주일 전만해도 백사장에게 면박을 주고, 문석을 혼내던 선우는 지금 모든 것이 망가져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라고 자문할만큼 망가졌다. 어쩌면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허탈하게도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라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약 그게 교훈이라면, 그 교훈은 주연도 아닌 엉뚱한 조연 김뢰하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마지막 이 남자, 에릭.

 

사실 총격전이 시작된 이후의 장면들은 비현실적일뿐만 아니라 영화상으로 보아도 꼭 필요한 장면일까 싶다. 총격전이 굉장히 오래 전개된 것을 보면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것 같기는 한데, 영화 전체와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모든 사건의 마무리는 엉뚱하게 에릭의 몫이다. 아무 원한관계도 없는 에릭은 모든 등장인물을 죽여버림으로써 강제로 스토리를 종료시킨다. 마치 배터리를 빼서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는 행위 같다. 

 

이 영화. 


이상하게도 여운이 길다. 이병헌의 나즈막한 목소리와 함께 자막이 올라간다. 금방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엔딩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수미상관의 구조이다(나래이션-스토리-나래이션)

2) 선우가 희수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직접 말해준다. 

3) 영화 전체가 꿈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3)의 해석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남겨둔다. 영화는 흔들리는 마음에서 출발해서 아름다운 꿈 이야기로 끝난다. 마지막 선우가 창문을 보면서 권투연습을 하는 장면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암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 영화는 더 이상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