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문화예술평론/영화평

<화차>와 인문지리

영화 <화차>를 보고 인문지리를 생각하다. 




화차 (2012)

Helpless 
8
감독
변영주
출연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송하윤, 최덕문
정보
미스터리 | 한국 | 117 분 | 2012-03-08
다운로드 글쓴이 평점  


1992년 일본의

 미야베 마유키 원작의 <화차>(변영주 감독, 이선균•김민희 주연)

* 소설이 나온 1992년은 일본의 부동산버블이 붕괴된 1990년 직후로, 일본경제가 장기불황에 빠지게 되는 원년이며, 가계부채문제가 폭발한 시기라는 점도 기억해두자. 

1. 변영주라는 감독, <낮은 목소리>로 인지도가 높은 감독 중에 하나다. 나는 변영주라는 이름보다도, <밀애>라는 작품으로 그녀를 만났다. <밀애>는 과거의 나를 조금 닮은 이종원과,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김윤진이 나온 불륜 스릴러(?) 물이다. 처음 남편의 외도에 충격을 먹은 한 여자가 잘생긴 시골의사를 만나 여자로서의 행복을 되찾은 식상한 이야기가 그녀의 섬세한 터치로 예술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전경린의 <내 생애 하나뿐이 특별한 날>이라는 원작 소설도 읽게 되었다. 영화가 낫네, 소설이 낫네, 말은 많지만, 내 느낌은 그렇다. 이 작품은 영상과 함께 봐야 실감이 난다. 이종원과 정사를 마치고, 피어오른 김윤진의 행복한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변영주의 연출을 보면서, 그녀가 "행복한 여자"를 탁월하게 묘사한다는 것을 알았다(정확하게 말하면, 배우로 하여금 그런 연기를 하게 만드는 능력이 되겠다). 전경린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가장 행복할 때조차 어딘지 모르게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2. <화차>라는 영화. 원작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 자체만으로도 명작이다. 변영주는 어느 새 "여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장 정교하게 천착해내는 감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겉은 멀쩡하지만, 기구한 사연을 가지게 된 한 여자. 그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세상은 쉽게 "이상한 여자" 취급을 하려고 한다. 물론 극 중에서 김민희는 이상한 여자를 넘어 무서운 여자가 맞다. 하지만, 무서운 여자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불쌍한 여자"다. 역설적이게도 그 불쌍한 여자가 무섭거나 이상하기보다, 결국은 불쌍하다는 본질을 드러나게 해주는 건, 결국 남자다. "사랑의 힘"이라고 하면 조금 낯이 간지럽고, 유전자 보존 욕구의 인류애적 승화라고나 할까. 

3. 장소의 재발견. 어떤 진보(?) 평론가가 <화차>의 마지막 장소로 용산이 선택된 것을 두고 용산참사를 떠올렸다고 한다. 물론 변영주가 '속칭' 좌파 냄새가 난다. 하지만, 진보적 지식인이 함부로 특정 사건과 영화의 의미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을 보면 조금 거북하다. 

오히려 나는 변영주의 지리적 오지랖을 <화차>에서 본다. 영화에서 보면 크게 제천, 마산, 창원, 진주, 함평, 청파동 등 다양한 지명이 나온다. 먼저 청파동은 "혼자 사는 여자"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내기에 가장 좋은 여러 정황들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처음에 나비를 키우고 싶다던 메타포는 결국 함평의 나비축제로 연결되고, 마지막으로 김민희를 찾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제천에서는 아세아 시멘트 공장이 배경으로 나오고(물론 극 전개와는 별 상관이 없다, "뉴스타파 18회" 참고), 마지막 용산역 가는 장면에서 "오세훈"을 비판하는 플래카드가 살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다른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신문을 잠깐 보는 장면에서 <BBK 사실로 밝혀지면 대선후보 사퇴할 것>이라는 기사가 등장했던 것처럼 깨알같은 디테일이다. 다른 많은 한국영화에서 장소는 항상 푸대접을 받는다(예를 들면, 연세대를 배경으로 한 <건축학 개론>은 실제로 경희대에서 촬영했다는 것?) 여기가 저기인지, 저기가 여기인지 항상 헷갈리고 어색하다. 그럴 때면 감독들의 지리적 상상력, 혹은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변영주는 장소의 의미와 분위기를 정확하고도 디테일하게 엮어내어 관객들에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디테일을 선물한다. 비슷한 케이스로 이창동 감독을 꼽는다. <밀양>(밀양), <오아시스>(의정부), <박하사탕>(광주, 군산). 변영주는 한 영화에서 이렇게 다양한 지역을 사용한데다가 심지어 어색하지가 않다.

 

여러 지역을 '캐스팅'해줘서 고맙다는 느낌마저 든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기의 선입견과 자꾸 영화를 억지로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산"하면 용산참사만 떠오르는 것은 오히려 용산에 대한 결례다. 

4. 가끔 그런 말 한다. "이 나라에서 **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뭔가." **에 여러 단어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처지가 외로울 때 한번씩 내뱉는 푸념이기도 하다. 변영주 영화를 보면, 여성이 불쌍하다. 심지어 그녀는 아시아 매춘의 국제연계와 매춘여성의 삶을 파헤친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다큐를 제작하기도 했다. <밀애>의 김윤진도, <화차>의 김민희도, <낮은 목소리>의 할머니들도, 참 불쌍한 여성들이다. 변영주 영화의 진짜 힘은, 여성이 불쌍해지는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나요? 아래의 View-on 상자를 눌러주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의견 남겨주시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