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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문화예술평론/영화평

<은교> 차라리 포르노그라피가 더 솔직했을.



은교 (2012)

7.1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정만식, 박철현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29 분 | 201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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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를 보신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원치 않으신 분은 화면을 뒤로 넘겨주세요. 



"은교 할아버지가 쓰신 거잖아요.

고마워요. 은교 예쁘게 써줘서,

나는요. 내가 그렇게 예쁜 아인줄 몰랐어요.

그렇게 예쁜 아인줄 몰랐어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이처럼."


은교의 마지막 대사다.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감독(이 경우에는 원작자 박범신 씨. 통칭 작가라고 한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저 대사는 아마 소설 속의 은교보다는 작가 자신에 대한 독백인 것처럼 들린다. 작가는 저 대사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은 영화평을 보았다. 대개는 호평이다.


먹먹하다. 

좋다. 

분위기 있다. 

균형감 있다. 

포르노인 줄 알았는데 깊이가 있다. 


아무렴, 아직까지는 성적으로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이 정도까지라도 솔직히 드러낸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군다나 어린 아이(17살이면 사실 어리지도 않지만)에게 느끼는 노인(극중에서는 70살, 이적요 분)의 사랑(정확히 말하면 섹스판타지)라는 엄혹한 소재를 이 정도까지 포장해낸 것은 대단하다. 작가도 작가이지만, 로리타가 될 뻔한 소재를 상당히 섬세하게 다루어준 정지우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초반의 느낌은 낭만적이다. 


서울의 마지막 시골이라고 알려진, 종로구 부암동에서 촬영된 윤적요의 집은 그 자체로 이미 목가적이다. 갑자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17살 은교의 등장. 허연 다리를 내놓고 자기의 의자에 잠들어있는 소녀. 은교의 등장은 말하자면 너무나 작위적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작가는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난 지금 판타지를 쓰는 거야, 그러니까 오해들 하지 말라고."


자신의 방어기제를 걸어놓고, 이야기는 비교적 빠르게 전개된다. 갑자기 은교는 이 집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설정 아닌가? 딱, 일본 포르노다. 하녀 설정. 머리에 두건만 걸치지 않았다뿐이지, 일본 포르노에 자주 등장하는 청소하는 컷.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눈으로 그 소녀를 만지도록 방치한다. 


당신이 느꼈을 어떤 것, 그리고 내가 느끼는 어떤 것. 인간적 동질감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성적 터치보다 더 효과적인 게 있을까? 인간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그것은 욕망하게 되어 있으니까. 아무튼 작가는 방어기제 이면을 신속하게 보여준다. 


"의식의 뒷면에 다들 이런 걸 가지고 있잖나?"


라고 물어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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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뛴다. 


적요를 모시는 신인작가 지우와 은교의 정사장면. 이것을 지켜보면서 분노하는 적요의 표정.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적요는 분노에 이기지 못하고 지우를 교사한다(고 적어도 영화는 관객에게 설명하려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요는 지우를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다. 적요는 지우가 탈 차의 바퀴에 바람을 빼 놓는다. 그리고 그 바퀴가 직접지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지우의 분노가 지우를 죽이게 만든다. 이 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지우는 곧 적요다."


적요와 지우, 어딘가 이름부터 비슷하지 않은가? 은교를 욕망하는 두 주체는 사실 하나이다. 그렇다면, 적요의 작품을 지우가 가져다 쓰는 이상한 설정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사실은 대필이나 표절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두 인물은 메타포일 뿐, 사실 하나이니까. 박범신 씨는 실제로 그런 말을 자주 한다(직접 그를 알지 못하지만, 그의 인터뷰를 주의깊게 들어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수 있는 말이다).



"내 안에 괴물이 있다."


누가 원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가들 사이에서는 퍼져있는 말이기도 하다. 늙은 적요 속에 젊은 지우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늙은 적요는 젊은 지우가 은교와 나누는 정사를 훔쳐보는 저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적요가 지우를 죽인 것은 정말로 작가가 은교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 같다는 느낌이 짙다. 가리고 싶은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정말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은교의 등장부터 이미 몽환적이었던 만큼 마지막의 말미도 믿을 수 없는 구석으로 가득하다. 은교가 왜 지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또 하필이면 자기가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그 집에서 지우와 거리낌없이 정사를 나눈 것도 수상하다. 이 모든 의심은 마치 헛된 욕망을 실현시켜버린 지우를 과감하게 죽여버림으로써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작가는 적요로 하여금 지우를 죽이게 한 것이 아니라, 지우로 하여금 지우를 죽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물, 은교는 돌아온다. 역시 몽환적이다. 은교가 돌아왔을 때, 적요가 아직 잠들어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적요는 잠들어있고, 은교는 잠든 적요에게 말을 건넨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얘기를 해줘도, 쓸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서 적요에게 감사해한다. 그리고 덜컥. 


영화가 끝난다. 


영화 "달콤한 인생"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꿈임을 암시하는 영화들이 있다. 나는 "은교"도 넓게는 그런 범주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건이 작가의 내면의 조그마한 방 안에서 일어나는 헤프닝일 뿐이다. 무엇을 해도 좋다. 누군가의 머릿 속에서 어떤 판타지가 일어나든 그건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니까. 


다만, 


나는 무엇을 해도 좋은 작가의 머릿 속에서도 부적절한 욕망을 분리해서, 그것을 죽여버려야만(적어도 극 중에서) 했는지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물론 그것마저도 작가의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