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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꿈 이야기

철학과 진로에 관한 간단한 소고

여기저기 손댄 모든 분야에서 대체로 무난하게 헤쳐나가기는 했지만, 한 분야에서도 이렇다할 성공, 아니 진척을 본 적이 없다. 써놓고 보면, 굉장히 오만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우 서른 둘, 아직 뭔가가 생기기에는 어린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지금 농사가 언젠가 수확으로 돌아올 날도 있을 것이다. 반짝 하는 인기나 평판은 부질없다고 애써 생각하려 한다. 안다. 그러나, 어딘가 허전하다. 

내 나이 쯤 되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하나씩 보편을 뚫고 올라온다. 개중에는 연예인도 있고, 학자도 있으며, 기자, 소설가, 사장도 있다. 조만간, 아니 언젠가 한번은 내 주관이 보편을 뚫고 올라오는 날이 있겠지라고 여기기에는 내 성격이 너무 급하다. 철 없던 시절,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에 참가해서 밤마다 차곡차곡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했듯이, 그래서 세상을 바꾸어놓았듯이, 나도 그러고 싶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지어 나이를 먹은 다음에도 '철학적 탐구'를 써서 세상을 한번 더 바꿨다. 아무래도 두번째 세상을 바꾼 정도는 첫번째 바꾼 것보다는 미약했지만. 

"차라리 다시 철학을 하지 그러니"

비트겐슈타인의 누나가, 20대에 이미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오만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철학을 하지 않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이미 자기가 다 해결해버린 문제에 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했다. 그러나 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가진 명석한 두뇌회전을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에게 그만한 고통은 없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논고'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었다. 이미 그는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세상을 바꿀만큼 바꿔놓았으니까. 

인생을 이렇게 짬밥 먹듯 올라가야만 하나. 이병 다음에 일병달고, 일병 다음에 상병 달고, 상병 다음에 병장 다는 것처럼 그렇게 올라가는 건가. 좀 더 빨리는 갈 수 없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커녕, 어디에 번듯한 잡지에 논문도 발표해본 적이 없는데 꿈만 크다. 불안하다. 케이팝스타에서 박진영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기가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노래에 나를 맡겨야 한다"

박진영의 이 평가를 나는 이렇게 바꾼다. 

"인생에 자기를 맡겨야 한다"

조금 인정하기 싫지만, 자기가 인생을 콘트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간의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말한다면, 자기 인생이라 하더라도 대개는 사회구조나 타인이 자기를 더 많이 움직인다. 자기가 콘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작다. 상대적 자율성이라고나 할까. 상대적 자율성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 같다.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던 대부분 그리스신화의 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오이디푸스는 신이 그의 운명을 예언했기 때문에 비극을 맞은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그 내면에 가진 성격적인 결함으로 인해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테면, 교만함. 오이디푸스는 인생에 자신의 흐름을 맡기는 사람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비극은 운명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인생을 자신이 콘트롤하려는 교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의 소설에는 도시에 대한 기막힌 통찰이 나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도시의 중심은 흐르기만 할 뿐 절대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흐르기만 할뿐, 멈추지는 않는다. 일단 멈추고 나면, 멈추지 않았을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빨리 알아보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강남과 명동을 생각해보라. 마찬가지로, 진짜 폭주족이란, 길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는 것이다. 그게 제이가 폭주족의 짱이 된 비결이었다. 

흐름에 나를 맡긴다. 예전의 나는 그런 사람을 경멸했다. 예를 들면 이런 논리에서 비롯된 사고구조다. 죽고 나서도, 기억되는 사람은 소수다. 대부분은 의미없이 살다가 의미없이 죽는다. 의미를 남기지 못하더라도 노력은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나이 때에 하는 생각이다. 지금 저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나와 같은 동질감보다는 뼛속 깊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며,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잘 콘트롤한다. 

흐름을 타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내가 탄 흐름과 다른 사람이 탄 흐름은 다른 흐름이다. 같은 흐름이라도 누가 탔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성격이 달라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능력만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된 것이 아니다. 빈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추종하지 않았더라면, 러셀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비트겐슈타인의 두 형들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그 흐름에 올라탔다고 해서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흐름을 타는 것, 

그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 

내가 탄 흐름은 다른 사람이 탄 흐름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 탔을 때보다 내가 탄 흐름을 좀 더 개선시키려는 의지인 것 같다. 어쩌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세상을 바꿀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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