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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꿈 이야기

나의 노래 이야기

나는 가수다 동영상과 함께 항상 월요일 아침을 연다.
일 때문에 영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침이면 항상 영상을 확인한다.

얼마전 김경호가 나오면서 나가수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아주 오래된 친구가 멀리서 성공하는 것을 본 느낌이랄까.
김경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뭔가 좀 복잡하다. 
임재범이 나에게 본조비쯤 된다면,
김경호는 나에게 마이클잭슨이다. 
임재범이 나왔을 때만 해도, 다시 노래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겨났다. 
김경호는 당연히 그 이상이다. 

중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 "노래를 잘 부르면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말을 들은 이후,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래가 뭔지 잘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당시 서태지를 좋아했다. 
서태지는 좋은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노래를 가장 잘하는 가수는 아니다. 
서태지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노래만 잘하는 가수들은 뮤지션도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래에 관해서 중학교때는 우상을 만나지 못했다. 

당시 나는 피씨통신 1세대였고, 음악방에서 보컬들과 교류를 나눴다. 
지금 보컬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는 김명기씨가 당시 하이텔에 자기 삐삐번호를
남겼다. 조심스럽게 번호를 누르자 폭풍처럼 그의 노래가 몰아쳤다. 
그 노래는 김경호도 콘서트때 자주 불렀던,
Firehouse의 "Overnight sensation"이다. 
이 노래는 다른 부분보다, 처음에 저음으로 시작해서 고음으로 이어지는 
샤우팅이 가장 압권이다. 
나는 그걸 따라했다. 그리고 동생의 삐삐번호에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하이텔 게시판에 올렸다. 
사람들이 '목소리는 좋은데, 아직 김명기씨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게 열 여섯살이었다. 

열일곱살때, 나는 길거리에서 산 인기가요 모음 테이프에서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듣게 되었다. 

.......

그리고 그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이제껏 들었던 어떤 목소리보다
깊었고, 음정이 높았다. 쉬즈곤은 저리가라는 투였다. 
원래 하이텔 게시판에서 김경호는 유명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앨범에는
"마지막 기도"와 "자유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하자는 김경호는 유령이었다. 
유령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난 온몸이 얼어붙는듯 했다.
특히 "그녀를 곁에둔 이유만으로 다른 이 세상 누구보다"에서
"구"의 음은 3옥타브 미까지 깨끗하게 올라갔다. 
그 이후로 김경호는 매주 가요프로에 나왔고,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김경호는 신이 되었다. 

김경호는 생각보다 한국 가요판도를 많이 바꿔 놓았다. 
당시만 해도 고음하면 김종서였는데, 김종서보다 한참 높은 곳에 
김경호가 있었다. 

김종서 노래 중에서 가장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노래가 "에필로그"인데,
김경호가 너무 대단한 실력을 뽐내니까 김종서가 나름 무리를 해서 만든 노래가 
아닌가 한다. 그 이후로도 나는 김종서가 에필로그를 끝까지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당시 29의 김경호는 젊었고, 고음의 대명사였으며, 게다가 동향이었다. 
나는 김경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고음, 저음, 중음, 모든 것이 부족했다. 
처음에 3키를 내려서 불렀다. 사실은 그것도 무리였다. 3키를 내려서 
100번쯤 부르고 난 후에, 나는 처음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완창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열 일곱이었다. 

고등학교 축제때 내가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만 해도,
3키를 낮춰서 불렀다. 나는 졸지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남자 고등학교에서 유명해진다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나를 놀려댔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에 나는 공부와 음악 두 가지에 미쳐있었다. 하루종일 이어폰을 끼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했고, 그 와중에 공부를 했다. 
모처럼 집에 오면, 이불 속에서 악지르는 연습을 했다. 
지금도 2옥타브 라 정도까지는 진성으로 거뜬히 올릴 수 있는데,
그 때 목이 터져라 연습해놓은 결과인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드디어 샤우트를 혼자 깨우치게 되었다. 
2옥타브 라에서 목소리를 바꿔서 3옥타브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 이후로 3옥타브 미까지는 올라갔다. 
노래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귀한 음역대는 2옥타브 라에서
3옥타브 도 사이다. 그 음역을 내지 못하면, 노래 좀 한다는 가수들의
노래를 결코 맛깔나게 흉내낼 수 없다. 클라이막스는 항상 2옥타브 시이기 때문이다. 
신해철은 저음이 강하고, 초고음이 강하지만 결코 좋은 가수는 아니다. 
왜냐하면 2옥타브 라에서 3옥타브 도에 이르는 마의 음역대에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절망에 관하여", "Here I stand for you" 등의 노래에는 초고음이 등장하지만,
마의 음역대는 나오지 않는다. 

2옥타브 시는 정복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 음만 제외하고는 대강 부를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학교에서는 가장 고음이 잘 올라가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서 껄럴껄렁한 친구들 중에 나에게 노래를 배우겠다고 노래방비를 대는 애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3이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 때는 웬만한 김경호 노래는 다 부를 수 있었고,
쉬즈곤도 거뜬히 불렀다. 

대학에 올라갈때쯤, 김경호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이미 고음은 들려줄만큼 들려준 상태였다. 
그리고, 특히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팬을 중심으로 김경호 팬들이 이탈했다. 김경호의 "비정"이나
"아름답게 사랑하는 날까지"도 좋았지만,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과 "금지된 사랑"의 복제품같은
느낌이 없었다. 김경호는 가수였지, 뮤지션은 아니었다. 

그는 기획사에서 만들어주는 노래를 불렀지만, 어느 순간 대중은 그 탁월한 고음에 질리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목은 점점 상해갔다. 그에게 성대결절이 찾아왔고, 나중에는
희귀병까지 걸리게 되면서 가수 김경호는 점점 잊혀져갔다. 
박완규가 김경호에게 핑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쇼프로에 나온다면서 화를 냈다고 하는데,
그도 젊어서 그랬겠지만, 돌이켜 보면 김경호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는 것이다. 
리메이크라도 하지 않으면, 빠르게 이탈하는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는 더 처참했다. 핑클노래를 리메이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경호의 하락세는 더 가속화되었다. 
더군다나 음반시장이 빠르게 붕괴하고, SM, YG와 같은 거대 기획사가 등장한 이후부터 그는
더이상 인기가수가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서도 물론 김경호 노래를 불렀다. 다만, 나에게는 해야 할 고민들이 더 많았다. 
서울에 처음와서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만만치 않은 새로운 세계관들을 접하면서 심각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다. 
지리학과는 운동권이 많았다. 가요보다는 민중가요를 더 많이 불렀다. 어쩌면, 그 때 음악에
미치지 않은 것이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인 것 같다. 그 때 운동권 선배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홍대 어디에선가 인디밴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철학을 비롯하여 비교적 진지한 사상을 좋아했다. 
음악과 지리학, 그리고 철학과 지리학, 운동권과 일반인(?) 이 모든 요소가 내 안에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의외로 군대에서 나는 굉장히 노래연습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나는 헌병이었는데,
헌병이 하는 일은 그냥 서있는 것이다. 헌병도 군대의 경찰이라 다른 잡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에 평균 7-8시간씩 보초를 서는 것이다. 특히 밤근무가 되면, 나는 보초
내내 노래를 불렀다. 그냥 부른 것이 아니라 빽빽 소리를 질러가며 불렀다. 겨울밤 산꼭대기에서
3-4시간을 보내면서 내 성대는 더 두꺼워졌다. 

제대하고 난 이후, 나는 처음으로 밴드생활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마침 휴학을 하게 된 이후,
우리 집 앞에 밴드 연습실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제대한 당일 나는 노란 머리로 염색을 하고,
연습실을 찾아갔다. 군대에서 연습했던 스키드 로의 "Wasted time"을 부르자, 연습실에서는
당장 나를 보컬로 받아주었다. 더불어 기타와 드럼을 배웠다. 몇 번에 거친 밴드공연에서 희열에 찬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밴드 생활이 기뻤던 것은 아니었다. 그 밴드는 나를 위한
밴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혀 관심도 없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면서, 정말 많은 종류의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초코크림롤즈의 "클라크"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굉장히 단조로운데, 아무리 기교를 내면서 불러도 그 단순한 보컬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기교가 없이도 이 노래를 맛깔스럽게 표현했다. 나는 "특정한" 노래만 잘 불렀던 것이다. 

게다가 초고음쟁이들은 곳곳에 숨어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연습실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후즐그레하게 보였던 그 사람은 
She's gone을 한 템포도 쉬지않고 완창했다. 

나는 최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양한 노래를 섭렵한 것도 아니었으며, 음악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칠 베짱도 없었다. 다시 복학을 하게 되면서, 나는 완전히 밴드를 접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동안 나는 노래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방도 가지 않았다. 
대신 공부를 했다. 당시 나는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다른 여학생은 항상 불편했고,
돈은 없었고, 복학한 직후라 친구도 없었다. 22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생활했는데, 난방이 잘 안됐고,
노래도 함부로 틀어놓을 수 없었다. 밤마다 나를 삼킬 것 같은 고요함과 어둠, 그리고 추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틀에 한번꼴로 가위에 눌렸다. 온기라고는 거의 없는 좁은 방에서 웅크려 다시 잠을
청했다. 나중에 이사를 하고 나서 나는 밤에 항상 티비를 켜놓고 잤다. 그래야 갑자기 일어났을때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잠을 잘 때는 이어폰을 끼고 소음을 들어야 
잘수 있는데, 아마 그 때 혼자 일어났을 때 기억이 굉장히 고통스러워서 그런 것 같다. 

가끔씩 나는 밴드생활을 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나에게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노래를 하지 않았다. 노래를 하면 다시 그 때가 생각나고, 또 음악이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김경호의 역량도 급격히 떨어졌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김경호는 깊어졌지만, 전성기의 목 상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어떤 노래를 불러도 흔들리지 않던 김경호가,
한 키 낮춘 "금지된 사랑"을 부르면서도 관객석에 계속 마이크를 주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김경호도 보지 않게 되었다. 

이미 얘기했지만, 나에게 임재범은 본조비쯤 된다. 
김경호와 비슷한 가수를 찾던 중 나는 임재범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록 김경호와 같은 파워는 아니지만, 목소리와 연륜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그 둘 중 어디에 비교해도 나는 허접했다. 

다시 내가 음악을 찾게 된 것은 순수하게 울기 위해서였다. 
자세하게는 쓸 수 없지만, 20대 후반에 울 일이 많아졌다. 
당시 나는 박효신에 빠져있었다. 물론 박효신은 김경호처럼 샤우팅을 하는 가수는 아니다. 
그러나 깊이와 감성 면에서 박효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 때 나와 매일 술을 같이 먹던 민섭이 형과 노래방을 가면,
나는 박효신 노래만 불렀다. 술에 많이 취해서 갔지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박효신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박효신의 감성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내 목소리는 오랜 샤우팅 생활의 결과로 굉장히 탁해져 있었다. 
목소리가 탁한 것만 문제는 아니었다. 2옥타브 미부터 솔까지 음에서
힘을 빼고 부르는 창법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불렀다.

"눈의 꽃"에서 "지금 올해의 첫 눈꽃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이 정도의 음에서는 나는 힘을 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고음만 부르면 락이 되었다. 

원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큰 소리로 듣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귀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박효신을 들으면서부터 나는 볼륨을 끝까지 올려서 들었다. 
그래야 감정에 심하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음악은 마약이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음악을 오래 듣다보면
현실이 음악인지, 음악이 현실인지 헷갈린다.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만큼은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대마초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대마초를 흡입하게 되면 말초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에 음악이 굉장히 크게 들린다. 
그 음이 물리적으로 크지는 않지만, 마치 귀의 바로 옆에 스피커를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게 된 사람일수록 대마초에
빨리 노출된다. 
음악이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수준을 넘어가면, 사람은 음악의 노예가 된다. 
잠시라도 음악을 듣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와 동갑인, 박효신 그리고 장기하. 가끔 장기하가 텔레비젼에 나오는 걸 보면,
나도 그 때부터 음악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내 음색은 
낡았다. 음색으로 하면 김경호와 임재범의 중간쯤 되는데, 그 정도 가수는 널리고 널렸다. 
반면, 장기하는 하나다. 

이런 저런 패배감은 결국 나를 공부의 길로 이끌었다. 집에서도 공부하기를 원했고,
나도 공부가 싫지 않았다. 게다가 학자로 대성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공부를 할 때 내가 느꼈던 좌절감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하고 싶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아직도 공부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나가수를 보면서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가수들이 자기 노래의 방향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었다. 나는 10년 넘게 노래를 하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가사. 이소라가 노래 가사를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부르는 것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가사를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체계적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다면, 누군가 알려주었을 법한 소중한 암묵지들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졌다. 
덕분에 사람들도 노래가 무엇인지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관객보다
먼저 울면 안된다"는지, 혹은 "소리를 어떻게 지르는가가 중요하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나가수 덕분에 김경호와 임재범은 다시 스타가 되었다. 김경호는 예전의 절반의 기량만으로도
다른 가수들보다 상위에 랭크가 되고 있고, 임재범은 시장가치 100억으로 추정되는 등,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다시 메인이 되었다. 

후배 덕택에 요즘 노래방을 자주 간다. 워낙 친한 사이라 술이 고꾸라진 상태에 가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온다. 소리를 지르면서, 임재범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풀이"를 하는 기분이다. 
나이를 먹고, 가족이 생기면서 내 감정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노래를 할 때만큼은 감정이 일시적으로 해방된다. 특히 임재범의 빈잔에서 "빈잔을 채워줘"에서
샤우트를 터트릴 때는 나에게 이런 힘있는 목소리가 있었나 싶다. 

누구나 가슴 속에 작은 예술가를 한 명씩 두고 산다고 김영하가 말하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받기 쉬운 작은 소년은 주변의 질시를 못 이기고 죽게 된다. 특히 부모들이 잘 죽인다. 
그거 해서 뭘 먹고 살겠니. 
고시와 의사면허를 제외하면, 뭘 먹고 살지 걱정하지 말아야 할 직종은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런 걱정과 함께 시작한 인생이라면, 끝까지 아름다울리도 없다. 작은 소년을 죽이고, 새로운
자아와 함께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평생 그 소년을 그리워한다. 

나도 그 녀석이 그립다. 너무 그리워서 다시 불러내고 싶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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