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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꿈 이야기

사이비 대중문화론

박범신, "살려고 쓴다." 


쓰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를 파괴한다. 그는 꽤 예민하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진행자는 그런 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의 삶에서 어쩌면 가장 말하기 불편한 내용을 담담하게, 그러나 칼날처럼 파고든다. 진행자는 그의 자살기도에 대해서, 난데없는 잠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나도 문학에 투자한 시간이 적지 않은데, 문학은 나에게 무엇을 해줬을까? 

문학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문학에 매료되었을뿐, 문학으로부터 치유받지도 못했고, 돈도 벌지 못했다. 김영하가 나에게 남긴 한 마디. "문학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잠시나마 믿는 사이, 점점 문학에 의존하게 되었다. 역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런 종류의 징그러운 이야기를 매일 접했다. 


자기가 어렸을 적부터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던 절에 불 지르기(금각사), 가장 고통스러운 눈을 그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딸을 불태워 죽이기(지옥도), 갑자기 눈먼 자가 되기(눈먼 자들의 도시), 반지를 꺼내기 위해서 망치로 자기 손 내려치기(손). 뿐만 아니다. 반복해서 보아왔던 영화들도 비현실적 영상들을 제공한다. 쌍절곤으로 뒤통수 후리기(말죽거리 잔혹사), 목 자르기(악마를 보았다), 노래방 마이크로 얼굴 때리기(범죄와의 전쟁), 거세당하기(쌍화점), 피 마시기(박쥐), 혀 자르기(올드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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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미시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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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 돈을 주고 콘텐츠를 구입했다. 


그리고 보면서 빠져든다. 사람의 감정은 점점 센 것을 원한다. 옛날에 박중훈이 무슨 영화에서 자기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 사람들은 손가락 따위로 성에 안차는 것이다. 적어도 이야기를 자본주의 예술에 국한시키자면, 이런 잔인한 장면을 생산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소비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영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변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요컨대, 멋대로 인생을 묘사하는 콘텐츠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던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자기자신에게 귀속된다. 

한 때, "교회는 메탈을 악마의 음악이라고 여겼다"는 말을 들었다. 

<예를 들면 마를린 맨슨의 음악>


마침 나는 교회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들의 편협함에 분노했다. 그리고 "예술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갈망이 샘솟았다. 헤비메탈에 매료되고 싶었다. 그래야 예술적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듣고 보니, 강렬하다. 더 강하게, 더 세게 매료시킬수록 관중은 더 많은 돈을 지불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스토션(distortion)이라는 전자음의 기법은 관중들을 좀 더 흥분시키기 위한 최적의 도구였던 것이다. 가끔 디스토션이 가미된 기타리프나 솔로를 들으면서 눈물 흘릴 때가 있다. 이유도 없이 감정의 끝을 긁어대는 것이다. 물론, 헤비메탈 밴드 역시 나중에 청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든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 때, 헤비메탈을 경외감 어린 눈으로 쳐다볼 때가 있었다. 이제야 본질을 알겠다. 그들은 그냥 청자들의 목적없는 감정을 분출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댓가로 음반과 콘서트 티켓을 판다.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부정적 상상들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봤다. 


대부분 원형은 대중문화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영화와 소설이 더 지독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절대 사람이 사실적으로 죽지 않는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총을 맞거나, 차에 치인 사람들은 게임 속의 캐릭터처럼 그냥 사라진다. 이들은 작품에서 죄책감을 거세해버렸다. 덕분에 관객은 죄책감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 지속적으로 관객이 영화관에 오게 만드는 일종의 약속이다. 헐리우드 영화는 생존의 투쟁으로 말미암은 극적 긴장감만을 남겨놓고, 남은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냥 잠시 그들의 혼을 빼놓는 것 뿐이다. 진정한 상업화는 이런 것이다. 지속가능한 폭력을 제공하는 것. 

나는 나를 지킬 의무가 있다. 

문화에 관한한, 그 문화가 자신의 상상력을 어떻게 지배하든지, 그 콘텐츠 제공자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긴 누구도 나에게 콘텐츠를 구입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콘텐츠제공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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