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영하 지음
- 출판사
- 문학동네 | 2003-08-20 출간
- 카테고리
- 소설
- 책소개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 신세대적인 삶을 꿰뚫는 자유로운 ...
김영하는 누군가 자신의 소설을 딱 한 권만 읽는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머나먼 유카탄 반도로 떠나면서 비로서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절대, <태백산맥>, <아리랑>의 아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읽을 수록 그 의미를 더 느끼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검은 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이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나는 한번도 책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타의 김영하 소설의 제목이 사람의 눈길을 확 잡아당기는 것을 떠올려 보자. “오빠가 돌아왔다”, “나는 나를 포기할 권리가 있다” 등 김영하의 소설 제목 중에서 몇 단어로 구성된 것은 드물다. “흡혈귀”라는 단편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소설의 소재인 흡혈귀가 바로 소설의 제목이 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검은 꽃”이라는 제목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멕시코 농장에서 재배하는 식물인 에네켄을 “검은 꽃”이라고 은유한 것일까? 아니면 태평양을 건너 남미에서 삶을 일구어나간 조선인들을 비유한 것일까? 소설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내 해석으로는 “검은 꽃”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검정이라는 색감의 이미지를 살려내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었다. 검은 색은 모든 색이 혼합되었을 때 나오는 최후의 색이며, 자연상태에는 발견하기 어려운 색이다. 게다가 종족보존을 위해서 화려한 색상을 선호하는 꽃의 입장에서는 검정은 쥐약이다. 따라서 “검은 꽃”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모순들이 응축되고 짓이겨진 총체인 것이다.
“검은 꽃”은 1905년에 멕시코 농장에 팔려간 조선인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상당부분을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검은 꽃”은 1905년부터 1915년을 배경으로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한 10여 명의 인생을 비교적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스케일이나 진지함으로 본다면 최소한 5편 정도의 장편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작가 황석영은 “’검은 꽃’은 대하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인데, 이 모든 이야기를 한 권으로 압축한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고 말했다. 김영하가 ‘검은 꽃’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은 철저히 본인의 의지 때문 이었다. 처음 소설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한 권으로 마무리하겠다는 김영하는 다짐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김영하는 본인의 소설이 더 길어져서 군더더기가 많아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한 권을 고집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김영하의 소설은 문체나 스토리 면에서 모두 “깔끔함”이라는 가치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빠른 스토리 전개와 깔끔한 묘사 그리고 군더더기가 없는 표현으로 독자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 농장에 이주했던 조선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는 외국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온 부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조정래의 “아리랑”에서도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는 조선인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멕시코로 이주했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이나 캘리포니아의 오랜지 농장의 경우에 비해서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 소설은 김영하가 출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들었던 멕시코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한국인들이 남미 어느 나라의 혁명군으로 참가해서 잠시 동안 임시정부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김영하는 자료 조사를 하고, 멕시코에 답사도 다니면서 이 소설을 집필해 나갔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답사를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답사만큼 사람의 상상력을 살찌우는 것도 없다. 결국 완성된 “검은 꽃”은 동인문학상에서 수상하고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다.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1년 여간 구상해 오고 비행기 값을 들여서 답사를 다녀온 노력의 결실을 나는 하루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검은 꽃”의 빠른 스토리 전개, 그리고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깔끔한 문체 모든 것이 좋았다. 더군다나 작품은 가볍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등장 인물은 황실의 육촌인 이종도부터 좀도둑 최선길까지 다양한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이종도의 딸인 이연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신여성에 해당하는데, 주인공인 김이정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주인공 김이정은 이 소설에서 가장 조명을 받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그는 성도, 이름도 없는 노비였다. 제물포에서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그는 멕시코로 향하는 일포드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개종한 신부로서 바오르 박종훈, 그리고 이종도의 아들이자 이연수의 동생인 이진우 등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일포드 선실 하나를 메우고 있었다. 조그마한 공간 속에 한데 묶여 들어간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양반과 상놈이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계급에 관계없이 먼저 온 순서대로 받아 먹게 되었다. 일포드 호의 선실이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계급이 아무 것도 아닌 허울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극단적인 공간인 것이다.
김영하가 설정한 이 공간에서는 요란스러운 일들이 종종 등장한다. 한 여인네는 배 속의 생활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고, 여자들은 남성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볼 일을 보아야 했고, 목욕도 세탁도 할 수 없어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바로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국가의 억압적 계급 질서로부터 탈피해서 무차별한 평등의 세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때로는 “양반과 상놈이 한 데 얽혀 민망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검은 꽃”의 말미에 첨부된 남진우의 해설에 따르면, 이와 같은 공간이 “근대를 향한”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일포드 호의 지저분한 선실이 바로 “탈 중세의 공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중화사상에 중독된 조선의 양반들은 한반도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계급”을 인질로 삼아 백성을 통치했다. 이와 같은 중세의 마법은 마치 그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조선 인민들의 무의식 속에 박혀 있었다. 조그마한 공간 속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이 특이한 공간을 통해서 그들은 스스로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며,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계급보다 선행함을 몸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기품과 섹시함을 겸비한 이연수에 대한 묘사는 몹시 흥미로웠다. 남성 작가들의 욕망 속에는 지성과 여성을 모두 갖춘 최고의 여인을 묘사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김영하의 의도였든지 아니든지, 그는 나로 하여금 그 여인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상상을 일으켰다. 연수에 대한 묘사의 절정은 “노루피”이다. 일포드 호에서 연수는 왕족의 기품을 감추지 못할 만큼 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탁월한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서는 섹시한 ‘노루피 냄새’가 난다. 그러니까 김영하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이연수를 묘사하고 있는데, 꽤 성공적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신분은 천하지만 영민한 김이정과의 사랑을 나누면서 더더욱 흥미로워 진다.
유카타 반도의 농장에 도착한 이들은 유카타 반도의 각 농장으로 배치되어 일을 시작했다. 그들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물론 건조하고 뜨거운 유카타의 기후가 문제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농민들을 짐승처럼 부리는 지주들의 처사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날아오는 채찍은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문치국가였다.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경우야 있었지만, 다 큰 어른에게 이처럼 매질을 가하면서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소설에 따르면 이것은 멕시고 농장 지주들이 노동력을 부리는 관행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은 바로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거의 비슷한 종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값싼 노동력이 외진 곳에 팔려가 강한 노동강도에 시달리는 이와 같은 현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황제의 육촌이었던 이종도만큼은 농장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종도는 멕시코라는 나라에도 법도라는 것이 있을 것이며, 자신은 조선인민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멕시코에 왔다고 착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에네켄 잎을 따야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그는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않고 조용히 명상을 즐겼다. 아마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양반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굽실거리는 그런 세상은 이제 없다. 이종도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종황제에게 친서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나는 김영하가 이종도라는 인물을 결코 가볍게 처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붓과 종이를 구해달라고 하며, 고종에게 편지를 쓰는 이 장면이야 말로 나는 “검은 꽃”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이종도는 말했다. 폐하께 편지를 쓰는 중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흘린 피눈물을 두 눈으로 보아 잘 알고 있다. 이 멕시코에도 분명 우편제도가 있을 터이다. 누가 메리다까지만 나가 이것을 부치기만 한다면 폐하께서 곧 방도를 마련하실 것이다. 개 돼지도 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이종도의 말에, 지난 석 달, 아니 배를 탔을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반년간의 고통이 떠올라 몇몇은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p.168)
이종도는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돈까지 맡겨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초로 글을 배운 보람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편지를 전달해주겠다고 약속한 권용준이 편지를 태워버린다는 점이다. 김영하는 아마 이 지점에서 “글”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글이란 못 배운 사람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힘들어 한다. 삶이 힘들고, 연애가 힘들고, 결혼생활도 힘들다. 이 같은 고통은 어떠한 모순으로부터 파생되는데,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 모순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는 행위일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에 글이란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전에 왜곡되고 파괴된다. 이종도의 밀서가 불타는 이 장면은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은 결국 불가능 하다는 김영하의 철학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종도는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에 분노하고, 또 편지까지 작성했지만, 당시의 조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다. 이게 우리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반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멕시코 농장이라는 공간을 만났다. 그 만남은 어딘가 찝찝하고, 거북한 만남이었다. 펜을 들어 글씨를 쓰는 행위는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경청하지 않았다.
4년 계약 임기를 모두 채운 조선인들은 쉽게 귀국하지 못한다. 일단 그들은 고국으로 가는 길을 몰랐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삶이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 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임노동자로 살아가거나, 다르게 살 궁리를 모색했다. 그 와중에 멕시코는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정을 비롯한 주인공들은 과테말라에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자는 목표로 정부군과 대적하다가 결국 사살된다. 이연수와 김이정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다. 이정은 죽었다. 연수의 마지막 남편이었던 박종훈도 죽었다. 결국 노루피 냄새의 소유자는 고리대금업자로 살아가며 평생 돈만 벌다가 죽었다는 후문이 더욱 쓸쓸하다. ‘에피소드’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의 마지막은 비참하지 않지만, 지극히 담담하다. 연수의 마지막 사랑일 줄 알았던 박종훈도 허망하게 죽고, 황제의 육촌이었던 이종도도 죽었다. 유카타의 에네켄 사업도 시들해지자, 이제 유카타의 주 산업은 관광이다. 세월이 100년이나 지났고, 이제는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조차 드물다.
“검은 꽃”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국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자 복사판이다. 결국 사람에게 주어진 희망이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것이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포드 호에 오르면서 발견했던 희망, 멕시코 땅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희망,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희망, 그 모든 희망은 구름처럼 흩어졌다. 꿈을 이루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허망한 것인가? “검은 꽃”은 소리도 없이 울부짖는다. 삶은 꿈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라고. 작가는 어떤 특정한 시각이나 계급에 자신의 관심사를 얽매여두지 않으려는 것 같다. “검은 꽃”은 수많은 사람들이 토해내는 울부짖음이 만들어내는 교향곡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