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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문화예술평론/서평

<10월 혁명사> 스탈리니즘의 한계



10월혁명사

저자
이완종 지음
출판사
우물이있는집 | 2004-10-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정신사적으로 또한 현실 정치적으로 20세기 세계질서의 한 축을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대학교 4학년 때 서양사학과의 수업을 들으면서 20세기 서양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다. 글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감상은 생략한다. 역시 대학교 4학년의 풋풋한 시선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면 좋겠다. 


1. 들어가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20세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는 태초부터 이상적인 사회를 갈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등의 고전적인 작품들에서 우리는 이상사회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 맑스의 사상은 이상사회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과정 위에 경제학적 분석을 덧붙였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고도 충격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식을 가져올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을 꿈꾸었지만,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의 다수당(볼셰비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혁명은 이 땅에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거대한 실험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러시아 혁명은 소수의 엘리트 혁명가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혁명은 단순히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이론과 러시아의 현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자 도전이었다.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를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가, 주변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또 점점 전운을 더해가는 유럽에서 러시아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공산주의 이론을 농민,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키고 적용시킬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10월의 혁명에 의해서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완종의 『10월 혁명사』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스탈린 시대까지의 정황을 자세하게 기술한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 지도부 특히, 레닌을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토론과 논쟁을 소개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우리는 이완종의 저작을 통해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혁명엘리트들이 어떤 전략을 취했는지, 또 혁명세력간의 불협화음은 어디에서부터 일어났는지를 조망할 수 있다. 이 책은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연방과학원 산하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1998년에 출간된 『레닌에서 스딸린이즘으로. 1917~1939』(본인 저작)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p. 35.) 다시 말해서 이 책은 한국 독자들에게 러시아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 전작의 증보판인 셈이다.

저자가 많은 설명을 추가하였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가독성(readibility)이 낮은 편이다. 『10월 혁명사』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이름이 복잡하게 열거되어 있으며, 사건의 정황보다는 혁명가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인물, 장소 등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원어를 그대로 읽는 표기방법을 따르고 있어서 다소 읽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가령 우리에게 익숙한 “흐루시쵸프”를 “흐루쇼프”라고 표기한다거나, “트로츠키”를 “뜨로쯔끼”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물론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영어식 표현을 지양하고 원어를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지만, 일단 영어식 표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다소 의아하게 다가온다.


2. 레닌이즘과 스탈린이즘

단순화의 위험을 무릎 쓰고 이야기한다면 저자의 관심은 주로 레닌이즘과 스탈린이즘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레닌과 스탈린의 생각을 보여주는 중간에 부하린, 트로츠키 등의 중요한 혁명가들의 생각도 정리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는 레닌과 스탈린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나누어진다. 1장에서 저자는 레닌의 이론을 소개하고, 혁명가들 사이에서 레닌의 이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2장에서는 스탈린의 정치적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서, 스탈린이 레닌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용시켰는지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권력을 잡은 이후 스탈린이 주창한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해서 서술하고, 4장에서는 스탈린의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묘사함으로써 스탈린이즘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표시하고 있다.

1917년 이후의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저자의 기술 방식은 매우 사실적이며 좀처럼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은 기존의 반소련주의적인 시각, 혹은 트로츠키나 부하린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스탈린 체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어떤 의미에서 냉전은 오랜 시간동안 미국/소련이라는 양극체제를 갈라놓으면서 러시아 혁명의 해석의 객관성을 희석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냉전이 종식된 지금이 오히려 혁명에 대해서 분석하기 적합한 시대인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내기 위해서 저자는 객관적인 기술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스탈린이즘이 결국 레닌이즘의 계승이며, 그의 실정은 사회주의의 국가가 필연적이었다는 뉘앙스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스탈린이즘 자체를 “국가 자본주의”로 매도하고, 스탈린이즘을 일종의 테러로 몰고 갔던 알렉스 켈리니코스의 견해와 상반된다. 알렉스 켈리니코스는 “왜 사회주의가 몰락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는 생겨난 적이 없으며 소비에트의 실험은 결국 국가자본주의의 맥락에 위치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으며, 국제적으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닮아있다. 결국 맑시즘 진영 내부에서도 소비에트를 긍정할 것인가 여부는 심각하게 분열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 켈리니코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소련의 실험은 맑스주의를 잘못 이해한 일부 독재자들의 전횡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그 질문을 한 목적을 질문하는 것이다.”라는 맑스의 말처럼 “레닌이즘과 스탈린이즘의 관계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 질문은 처음의 질문 즉, “레닌이즘은 스탈린이즘을 태동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생산적인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사회주의를 긍정하는가, 레닌을 긍정하는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가령 혁명의 해석에 대한 비사회주의자, 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는 것이다.


<비사회주의자>

1. 맑스의 이론은 틀렸다.

2. 레닌은 맑스를 잘못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발전을 저해했다.

3. 스탈린은 레닌을 계승했고, 결국 사회주의 국가는 잘못된 계승의 연속이었다.


<레닌주의자>

1. 맑스의 이론은 옳았고, 레닌은 그를 창조적으로 계승했다.

2. 레닌의 정책(프롤레타리아 독재, 전시공산주의, 네프)은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최적의 정책이었다.

3. 스탈린은 레닌을 계승했고, 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트로츠키주의자>

1. 맑스의 이론은 옳았고, 사회주의는 여러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2. 레닌은 전술적으로 옳았지만, 스탈린은 레닌을 제대로 계승하지 않았다.

3. 스탈린은 사회주의를 잘못 적용했으며, 실제 소비에트의 행태는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


사회주의의 시작과 몰락에 대한 논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을 벗어나기 힘들다. 가령 레닌을 인정하고 스탈린을 부정하는 경우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레닌의 책임을 조금 덜어줄 수 있다. 반면, 스탈린이 레닌이즘을 계승했다고 가정하면, 결국 레닌이즘이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는 반사회주의적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에 대테러를 기획해 수십만 명의 죄 없는 사람을 반소분자로 몰아 처단했다. 이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떠나서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용납되기 어려운 악행이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를 기점으로 사회주의권이 몰락함에 따라서 그 원인을 스탈린에게 귀결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스탈린을 레닌의 계승으로 인정한다면, 그가 저지를 악행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3. 스탈린이즘에 대한 평가


“현재 러시아에서 스딸린주의의 재현이 과연 가능할까?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소연방이 붕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딸린이즘의 부활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p. 651.)


다음과 같이 시작된 저자의 맺음말은 스탈린의 평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들을 남기고 있다. 그가 보기에 스탈린의 이념이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할만한 정치 세력은 남아있지 않으며, 스탈린이즘이 무기력하다는 것은 흐루시쵸프 등의 개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과연 “스탈린이즘”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하고 싶다. 적어도 이즘이라는 칭호를 붙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정책방향이 있어야 하는데, 스탈린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던 것일까? 수십 권의 혁명적 저자와 소책자 등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펼쳤던 레닌, 트로츠키 등의 이론가와 스탈린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듯이, 스탈린은 자기만의 공산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스스로의 독특한 공산주의 사상을 통해서 움직였다기보다는 기회주의적이고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는 권력욕이 대단히 강한 인물이었으며, 반대파를 무조건적으로 증오하는 배타적 인물이었다. 소위 우리가 ‘스탈린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레닌의 사상에 스탈린 개인의 배타적 성향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진 돌연변이였던 것이다. 레닌의 생존 당시에는 스탈린이 네프를 지지했다가, 레닌의 사후에 꿀락의 전멸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스탈린은 강한 국가의 수장이 되고 싶은 욕심이 무척 강했고, 따라서 자기의 반대파들을 반소분자로 몰아서 숙청하는 데에 능숙했다. 그가 행동하는 방식은 “사회주의의 발전방향”이라는 맥락과는 별 상관이 없었으며, “자기 권력의 유지”와 “배타적 세력 처벌”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떤 의미에서 스탈린이즘은 없다. 반대로 레닌의 경우에는 자기 철학의 체계가 질서정연하게 잡혀있었다. 트로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주장한 영구혁명론은 세계적으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맑스의 생각을 좀 더 심화시킨 형태로서 독특성을 가진다. 반면 스탈린의 경우에는 일정한 행동패턴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았고, 만약 그러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상”의 영역이 아닌 “개인적 기질”의 영역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이즘이 레닌이즘의 계승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모호하다. 그의 말 속에는 레닌이즘 속에 이미 사회주의 몰락의 씨가 배태되어 있었다는 요지가 숨어있다. 이는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유행어처럼 역사의 승패가 결정되고 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판단인 것이다.


4. 맺음말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완종의 『10월 혁명사』의 논쟁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은 소비에트 권력 내부를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식의 스케일도 넓었다. 소비에트 혁명의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공부를 하고 난 연후에야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론서 수준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해석을 많이 접해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기술방식은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맺음말에서는 비교적 견해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결국 레닌이즘은 스탈린이즘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둘은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다.(p. 652.) 트로츠키주의 역시도 러시아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었다.

러시아의 현실에 사회주의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진단은 우리에게도 무겁게 다가온다. 한국은 현재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피해국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북녘에서는 거의 끝나가는 사회주의 실험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고, 남쪽에서는 케케묵은 반공정서가 판을 치고 있다. 애초에 우리 사회에 공산주의 따위가 전혀 수입되지도 않았다면,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지만, 이 문제는 결국 스탈린과 레닌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스탈린은 레닌이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지만, 그의 정책은 결코 레닌이즘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그루지아 출신의 혁명가라는 주변부 콤플렉스, 자기의 의견에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한 불관용, 특유의 고집 등 스탈린 개인의 기질이 스탈린이즘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창했지만, 이는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표방하는 일부 관료들의 독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을 구현하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도 무거웠던 셈이다. 맑스의 이야기처럼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가 실현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질문이다. 혁명이라는 실험은 결국 수많은 개별국가의 특수한 조건의 영향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