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대학교 4학년때 썼던 서평. 드물게, 다시 읽어도 덜 부끄러운 글이다.
1. 『대중독재』를 읽기까지
대중독재는 임지현 교수의 단독 작품이 아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라는 단체에서 섭외한 전문가들의 ‘대중독재’의 시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범위는 유럽을 망라하며, 우크라이나,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기억의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해 보인다. 우리가 전체주의의 유산이라고 부르는 나치나 파쇼, 혹은 박정희의 독재 체제는 지배자의 강요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이 책의 논문은 대중독재의 작동기제에 대해서 기존의 논의 보다 좀 더 복잡한 틀을 제시하고 있다. “나치의 체제가 악하다, 그리고 민중은 나치의 희생양이었다”라는 한국 사회의 집합적 담론에 대하여 이 책은 과감하게 대중의 책임을 묻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이왕 책의 주장이 명확한 바에야 나는 이 텍스트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에 대해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책의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비슷한 주장의 논문이 계속 등장해, 내용도 점점 신선한 맛이 떨어졌다. 스페인의 프랑코 체제가 30년을 더 통치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무려 57%나 된다는 설문조사의 결과(황보영조, p. 134.)은 충격적이었지만 그 이후로는 그만한 충격은 없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저항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소비에트 대중의 다양성을 부각시키는(박원용, p.353) 작업, 혹은 박정희 체제도 일정 부분 대중들의 동의를 안고 있었다는(황병주, p. 475) 논리가 왜 한국사회에서 도발적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중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제 시대의 협력자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공교롭게도 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한국 사회의 진보/보수의 경향이 명확하게 나뉜다. 소위 진보진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박정희 체제를 ‘파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보수진영에 있는 사람은 어김없이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을 찬양하며, 일제 시대의 협력자들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내가 책의 내용을 과감하게 요약해 버리고, 거창하게 진보와 보수의 기준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이다. 학문적 수준에서 대중독재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의미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논자들은 서유럽, 동유럽, 소비에트, 심지어 라틴아메리카까지 넘나들면서 대중독재를 논하지만, 정작 그들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좌파적 지식인들은 ‘대중독재론’을 인정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어두운 과거를 모두 긍정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몰린다. 조희연 교수가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론을 두고, 우파에게 유리한 ‘정치적 혐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책의 질문이 도발적인 만큼, 대답도 도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가면을 벗고 싶다. 따라서 나는 임지현 교수를 비롯해 ‘일상의 파시즘’론 등을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과 솔직한 대화를 하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겠다.
2. 대중독재론과 협력자, 그리고 개발독재
믿기지 않겠지만, 개발독재와 일제의 협력자라는 문제는 일생을 두고 나를 괴롭혀온 문제였다. 사상이 단순했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목이 날아가더라도 협력을 하지 않는 사람만 선이고, 그 이외의 모든 사람은 악이며, 그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은 최악이라는 공식이 나에게 있었다. 그 지점은 임지현 교수의 서문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전후 파시즘에 대한 연구는 도덕주의적 이분법에 안주해왔다. 소수의 나쁜 ‘그들’과 다수의 결백한 ‘우리’라는 이분법은 좌파 진영이나 우파 진영 모두가 공유하는 냉전적 패러다임의 전형이었다. 우파의 전체주의론은 국가의 테러와 폭력, 권력의 강력한 통제 등 강력한 정치 체제를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공통점으로 간주했다.(p. 24)
바로 나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사회에서 독재, 혹은 파시즘에 대한 평가가 극렬하게 양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대중독재』의 저자들은 바로 이 이분법에 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가 폭력과 억압으로만 대중을 통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들이 독재를 탄생시키고 대중권력을 지속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선의를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논리는 독재 권력에 면죄부를 준다고 느끼게 한다. 게다가 좌파진영에서 신처럼 받들어왔던, 민중에 대한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 좌파진영은 결국 민중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결국 그 세상은 ‘사회주의’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대중독재』의 논지가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중독재』에 따르면 선한 민중이 없어진다. 이는 곧 진보진영이 기댈 언덕이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이 책은 독재에 대해서 대중이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을 청산함으로서 역사가 바로 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우리에게 호통을 친다.
소수의 나쁜 그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곧 역사적 청산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청산 대상에 들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역사적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진지한 역사적 청산을 가로막는다.(임지현, p.52)
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대중의 출현은 세계대전의 영향이 컸다.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에서 국가가 전 국민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혹은 지지 않기 위해서는 본국의 물자와 인력을 모두 다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총력전은 강력한 대중을 필요로 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야 말로 생존의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유명한 예로 나치 독일에서는 반유대인 감정을 국민을 단합하는 기제로 사용했고, 프랑코 체제는 이슬람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가톨릭 세력의 단합을 강조했다. 이처럼 창조된 대중은 독재에 대해서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순응하고 협력했다. 수많은 독일의 민중, 혹은 스페인의 민중이 모두 강제로 동의를 당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은 이제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대중은 무엇인가? 『대중독재』의 주장에 따르면, 대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 1987년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어낼 때의 그 대중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독재를 향수하는 대중이 있는 것이다. 독재를 평가할 때 대중이라는 변수를 새로 집어넣는 것은 기존의 독재에 관한 일면적인 생각을 충분히 뛰어넘는 훌륭한 발상이다. 학문이 결국은 세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기억의 정치학’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두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학문을 실용적인 가치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기억의 정치학’은 결국 전선(戰線)을 희미하게 만드는 논의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3. 반론, 그리고 재반론
예상할 수 있듯이 대중독재는 많은 독자들의 반론에 직면했다. 『대중독재』의 논리에 대해서 반박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이 “민중을 적으로 돌리고 파시스트로 만드는 논리”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서 임지현 교수는 이를 두고 ‘엉뚱한’ 반박이라고 주장했다.(p. 12)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따지기 전에 나는 임지현 교수의 태도를 문제 삼고 싶다. 왜 어떤 학자들은 자신이 써 놓은 글을 사람들이 오독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거대한 『대중독재』라는 프로젝트에 들인 공을 따진다면, 이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논지를 반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임지현 교수는 오독이라는 말을 너무 즐겨 쓰는 나머지 “자신의 논리가 가치중립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글을 오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글을 명료하게 쓰지 못한 것을 탓해야지 반박하는 사람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내 시선으로 보자면, “왜 파시스트를 놔두고 엉뚱한 대중을 욕하느냐”는 투박한 질문은 『대중독재』의 논리를 명쾌하게 뚫어보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는 현대사의 책임론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제에 대해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협력자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사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대에서 이 문제는 곧바로 책임 문제와 직결된다. 가령 한국의 협력자가 약 1만 명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민중은 2천만 명이라고 하자. 이들에게 책임을 추궁한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수식이 성립할 수 있다.
1. 일제에 대한 책임/1만 명의 협력자
2. 일제에 대한 책임/1만 명의 협력자 + 2천만 명의 민중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1번 공식에 대해서 임지현 교수는 2번 공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논리를 현실 정치에 적용한다면, 곧바로 1만 명의 협력자들은 면죄부를 안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2천만 명의 민중이 ‘일제에 대한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의 무게를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임지현 교수는 “왜 민중을 욕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좀 더 성실한 대답이 필요한 것이다. 임지현 교수도 협력자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대중독재』의 논리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임지현 교수의 논의가 현대 한국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신선한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양심적 병역거부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임지현 교수의 시각은 한국 사회의 파쇼적 잔재에 대한 공격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임 문제로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한국에는 꽤 많은 숫자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자들이 있고, 비교적 최근이 되기 전까지 이 운동은 언론의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일부 진보적인 매체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다루면서 이 문제가 사회적 담론의 일부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법원은 여전히 보수적인 판결로 이들을 처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남자는 군대를 가야 사람이 된다”는 무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몰지각한 무의식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무의식의 뿌리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가장 근원적인 원인으로 박정희 독재와 마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군국주의 유산은 박정희 시대에 와 비로소 국민군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군대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군대가 되는 그야말로 군아일체의 시대를 거친 대중이 지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비판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대중독재』의 논리로 돌아가 보자. 대중 속에서 발견된 일상적 무의식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예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폭력적인 침묵을 들 수 있다는 지점은 동의할 수 있다.(황병주, p.516) 그렇다면 피지배자였던 대중이 ‘군아일체’의 무의식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만약 그 책임을 대중에게도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박정희 정권과 똑같은 수준의 책임이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대중독재』의 순수한 동기를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책임’의 문제에 들어서면 나는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책의 저자들의 의견이 더욱 궁금해진다.
4. 책임, 혹은 학문?
『대중독재』는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이나 철학적인 논리로 반박되어야 한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대중독재라는 것의 존재를 부정할 방법이 없으며, 대중의 일정한 합의와 동의를 인정하지 않을 방법도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대중독재』를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이것이 누구의 책임과 관련되는지”를 끊임없이 따져보는 것이다. 결국 정치학의 영역에서 임지현 교수를 비롯한 『대중독재』의 저자들은 가치중립의 탈을 벗고 책임문제에 대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논의의 수준을 철학적으로 끌어올린다면, 『대중독재』의 메시지는 ‘학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포괄할 수 있다. 현실 정치와 관련 없이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학문인가, 대중의 필요에 봉사하는 것이 학문인가 혹은 그보다 많은 선택권이 있을 수 있다. 주권국가의 입장에서 이 책의 실용적 가치는 부정적이다. 국가는, 『대중독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는 정치종교의 순교자를 필요로 한다. 또, 대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운동가들에게 이 책의 가치는 부정적일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현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민중이 이토록 독재에 동의했다면 민중의 순결성이나 저항성은 희석되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은 철학적으로 절묘하게 비틀려진 입장의 차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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