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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킴/경제지리학2012

마르크스주의와 하비의 만남

데이비드 하비라는 늙은 지리학자가 있다. 그는 <자본의 한계>라는 묵직한 저서를 통해서 이 시대의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비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987년에 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다. 이 책은 하비의 이론이 지나치게 구조주의적이라는 반론에 대해서 답하기 위해서 쓴 작품이다. 이 책으로 인해 하비는 일약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가 되었다. 1990년대 소련과 구공산권이 붕괴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자본주의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2003년에는 <신제국주의>, 2005년에는 <신자유주의>를 연속으로 출간하면서 하비는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서들은 하비의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 유용할 뿐이다. 하비의 진면목을 보려면, 아무래도 머리를 쥐어짤 생각으로 <자본의 한계>를 통독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마찬가지로 하비의 <자본의 한계>는 만만한 책이 아니다. <자본의 한계>는 상품, 노동, 가치에 대한 일반론적 정치경제학의 기본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전형논쟁과 금융자본주의 논의, 지대론, 그리고 자본주의 위기론까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지나간다. 하비는 마르크스주의의 제반문제들을 고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본순환의 흐름을 구조화해서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종 간과해왔던 지리적 이동성과 고착성이 자본의 축적과 순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고찰하고 난 후, 하비는 자본순환의 3단계 모형을 완성했다. 

하비로 인해서, 다른 많은 후학들이 마르크스주의 사회지리, 혹은 정치경제지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미스(Smith), 브레너(Brenner), 스윙지도(Swyngedow) 그리고 카스트리(Castree) 등의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지리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카스트리는 하비의 이론의 매우 철학적 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세부학문분과에 대한 적용까지 상당히 다양한 영역에서 글을 쓰고 있다. 카스트리의 글 중에서 결국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떠오른다. 대게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하듯이, 카스트리 역시 수정주의로는 자본주의가 본연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불안정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카스트리 역시 마르크스의 해법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감히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고 할만하다.

사회학자나 정치경제학자들은 1990년대 후반 느닷없이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부상하는 것이 상당히 당혹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이미 소련의 붕괴로 인해서 전 지구적으로 좌파들이 패닉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전환 이후에 "결국 자유주의가 답이다"라는 담론이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와중에 비교적 뒤늦게 마르크스 진영에 뛰어든 지리학자들이 "정통 맑스주의"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지리학 내에서는 하비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급진적 지리학자(radical geographer)라고 범주화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발전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한국에 사는 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비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