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1학기를 마친 시점에서 썼던 글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블로그는 당시의 고민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다. 지금은 이런 고민이 해결된 것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는 걸까요?" 그 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산다"라는 아버지의 대답을 들었고, 한동안
그걸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 지금도 내가 왜 사는냐는 질문은 한가하고 정신줄이 남아도는 인간이나 던지는 쓸데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혹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종종 던져보곤 한다. 누구도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지 함부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라는 비밀처럼 사람들은 모두 아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모처럼 황금어장을 제 시간대에 시청하면서, 윤종신이 코딱찌를 판 이야기를 들으며 지하 자취방에서 미친 듯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자 '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잠시 스쳐지나갔고, 그 이후에는 뭔지 모를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요 며칠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휴가'였다. 대학원 3학기를 무사히 마치면서, 동시에 밥벌이까지 해온 입장에서 나는 결코 한가하지 않았다. 지난 학기동안 단 하루도 집에서 하루종일 편하게 쉬어본 날이 없었다.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했다. 어찌 보면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람을 만났다. 이 네 가지가 묘하게 엉켜진 내 삶은 고장난 수레바퀴처럼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리고 갑자기 며칠의 휴가가 주어지면서, 나는 실존의 문제에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먹고 사는 물질적 존재다. 맑스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어찌보면 공부나, 이념, 사상의 문제는 둘째다. 내 벌이가 조금 남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그래도 남으면 주변에 좋은 친구들과 나누고, 그래도 벌이가 남는다면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남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겨우 밥벌이를 해결하고 남은 조금으로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내 삶의 목표에서 일차적 목표는 어느정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행운이 언제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의 화두는 내 생활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부이다. 나는 주제넘게 공부의 본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자기가 먹고살아야 하는 이상의 지식을 장착하고 다니는 일이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원칙은 명색이 공부를 한다는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시기해서 만든 원칙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나는 연구가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할 뿐이므로 거기에서 오는 지식권력을 즐기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먹고살 만큼의 지식만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이라고 알려져 있는 대학에서 나는 진짜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지, 좀 의심스럽다. 물론 전 세계의 대학, 혹은 한국의 모든 대학으로 이야기를 확장시켜서 일반화된 비판을 하지는 않겠다. 내 이야기는 주로 내가 속한 대학과 학과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보고 있는 책은 국가 권력(State Power)이라는 사회학자 밥 제솝의 책이며 사회학적 관점에서 국가를 재정의한 저서이다.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고, 동료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다시 "왜 공부를 하는가?", 혹은 "공부를 잘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 책은 국가를 다시 한번 정의해보자는 맥락에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국가이론을 부활을 시도한다. 어쩌면 이 책은 밥제솝의 표현대로 "이론"보다는 일종의 "시각"과 "접근"이라는 말을 통해서 국가는 일면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새삼 펼치고 있다. 이 책이 영향을 받은 하나의 큰 흐름은 맑스주의이다. 대부분 맑시즘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그러하듯, 밥 제솝 역시 맑스는 국가분석에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맑스주의 국가론은 자칫하면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라는 짧은 어구로 요약되는 도구주의적 해석으로 흐르기 쉽다. 국가는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에는 푸코를 비롯한 포스트모던의 조류가 있다. 특히 푸코는 철학에서 당연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개념들을 해체하는 데 힘썼던 학자이다. 푸코의 영향력이란, 당대의 대부분 학자들을 다 합치고도 남을 만큼 지대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제솝은 맑스와 푸코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잡하게 긴 설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솝의 전략국가론은 내가 보기에 맑스와 푸코의 중간쯤의 단계에서 국가를 보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0세기 초 맑스를 처음 접한 대다수 지식인들도 지금과 똑같은 전철을 밟아왔다. 처음 맑시즘을 접한 러시아의 지식인 대부분은 혁명을 할 필요가 없으며, 자동적으로 자본주의는 궤멸된다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다. 레닌처럼 맑시즘을 실천적으로 응용한 혁명가는 그 때도 소수였다. 결국 레닌의 사상은 스탈린으로 내려오면서 엄청난 오해와 불신을 낳았고, 결국 스탈리니즘이라는 국가주의 괴물로 환생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은 맑스에 대한 교조주의적 해석과 창조적 해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그 과정은 1989년 공산주의가 공식적으로 몰락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구조주의냐 탈구조주의냐, 등 보통사람들은 알아먹을 수도 없는 다양한 신조어들이 쏟아지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핵심적 진리를 담고 있는 양, 누가 만들어낸 조어를 외우지 않으면 지식인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하곤 했다. 따지고 보면 사회자본이니, 아비투스니 하는 말들을 알고보면, 보통 사람들도 나이만 먹으면 대충 알고 있는 어떤 현상을 팬시하게 이름을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굳이 구조주의니 뭐니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을 구분할 줄 알고, 옳은 말과 틀린 말을 구분하는 나름의 기준도 가지고 있다. 부르디외가 만든 아비투스, 그람시가 연구한 헤게모니,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합리성 등의 개념을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며, 거꾸로 그 학자와 개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아비투스와 같은 무언가가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간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매우 상식적으로.
필요없이 설명이 조금 길어졌는데, 도대체 "어떻게 사회과학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더나지 않는 지점이 여기이다. 내가 사회과학을 남들보다 좀 더 공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 지식이 가미된 말을 별로 경청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물론 나도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별로 대단한 것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즉, 배워도 배운 것 같지가 않고, 설사 대단한 것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 대단한 무엇은 실제 정책이나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네르바를 변호해주는 박찬종은 정말 '대단한' 지식을 가진 셈이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그림같은 법전의 언어로 미네르바를 보호해주는 변호사. 내 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해도 박찬종이 미네르바에게 주는 정말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처럼 진짜 도움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내가 밥 제솝을 통해서 배운 무엇을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말로 떠들 수는 있어도, 정말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서 밥제솝의 이야기를 인용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나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실존적 선택"이라는 말을 써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 분의 "실존적 선택"에 대해서 왜 그러느냐고,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조롱섞인 말이 오갔다. "남이야 가슴이 찢어지든 말든 자기 x 꼴리는 대로 하는 게 실존적 선택이냐"라고 누군가 묻기에 나는 그냥 그렇다고 했다. 자신의 선택을 남이 좋아할수도 있지만, 싫어할 경우에도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는 그것이 실존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x도 아니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분이 상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까뮈의 이방인을 몇번이고 읽으면서 그 의미를 절절하게 깨달았던 그 '실존적 선택'이라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러워졌을 뿐이다. 그게 일반 사람들이다. 실존적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고, 그게 무모하고 어려운 도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찌 보면 나는 그 단어가 가진 비일상성을 활용해 단박정리를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의도는 전달되었고, 나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국가를 전략관계론으로 설명하든 집행위원회로 설명하든, 보통 사람들은 국가가 자본의 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국가를 벗어나서는 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학계에서 "국가를 부정"하든, "긍정"하든 지랄을 하든,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사회과학이 상식을 뛰어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자기들끼리 만든 단어가 옳네 그르네 하면서 논문을 써대고, 책을 쓰면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이런 지식을 '진짜 지식'인 것처럼 으스댄다. 개중에는 진짜 지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자들은 왜 스스로 철학이 끝났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학자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공부의 결과가 도대체 우리 삶의 어디를 비추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극단적 회의주의를 치닫고 있는 요즈음, 누가 나에게 또 말한다. 내공이 부족해서 그렇단다. 좋아. 인정한다. 나 내공 바닥이다. 내가 안다. 그런데 당신은 내 내공이 바닥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물론 '척' 보면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척보면 아는 정보는 다른 모두에게 공개된 정보이다. 내가 쓴 페이퍼, 내가 쓴 잡글, 내가 한 헛소리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내공운운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도르노가 욕했던 실증주의자인 것 같다.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 나는 한 편으로 공부를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일을 한다. 아마 나에게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공부를 포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이 지긋지긋한 공부. 공부.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