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어떤 영화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이 영화는 "값싼 카타르시스"의 천국이었다. 실미도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코드, 즉 대의를 위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슬픔이랄까. 그러니까 이 코드는 몹시 익숙하지만, 효력이 강하다. 나는 감독의 기술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요원이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마 옆에 있던 여자가 아니었으면, 울음보가 터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여자는 광주에 대해서 그다지 잘 알지 못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광주다큐멘터리까지 보면서 공부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광주는 고등학교때부터 나의 짐이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광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비단 내 고향이 광주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전두환을 찢어 죽여야겠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고, 전두환의 후계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주는 사람들도 모두 사형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심지어 경상도 사람들이 막연하게 싫기까지 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 이 말은 종교적이고, 어딘가 멋져 보이지만, 거대한 모순이 있다. 용서는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비굴하게 두들겨맞은 사람이 힘쌘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건 용서가 아니라, 코미디다. 용서가 아니면 남은 것은 복수였다. 물론 광주에서 당했던 그대로 유혈사태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광주를 위해서 나는 뭘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을 다 보냈다.
그런데 "화려한 휴가"라니! 벌써 광주사건은 많은 소설에서 소재로 쓰인다. 재미있는 점은, 한병훈의 "화려한 휴가"나 안정효의 "태풍의 소리" 모두, 전두환을 죽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복수. 그렇다. 참혹한 유혈극이 끝나고 난 후에 인간이 느끼는 당연한 감정은 바로 복수심이다. 이 영화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광주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간의 웃기지도 않는 광주극에 비하면, 꽤 사실적이었다. 영화가 놓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광주 시민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 광주항쟁은 몇몇 시민군만이 아닌, 모든 시민의 싸움이었다.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가 차단되었고, 광주는 일종의 무정부상태였다. 그래도 광주 시내에는 도둑 하나 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사재기도 하지 않았다. 쌀값도, 담배값도 여전했다. 닭살 돋는 표현을 구사해보자면, 이는 "혁명이 얼마나 인간성을 고양시켜주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둘째, 광주 사투리가 잘못 쓰였다. 주인공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서울말을 쓴다. 택시기사가 쓰는 광주말은 너무 오바가 심해서, 어딘가 광주스럽지가 않다. 영화를 만들때, 사투리를 잘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따, 미쳐블겄네."라고 말하는 이요원이 조금 어색하기야 하겠지만, 주인공 모두가 표준말을 쓰는 것은 너무 심했다. 주인공중심주의를 버려라.
셋째,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언급이 너무 없다. 영화는 신부의 입을 빌어 성의없이 정치상황을 모두 설명해버린다. 과연 일개 신부가 전두환의 의도를 알 만큼 똑똑했을까? 광주사건때 가장 중요한 구호는 딱 두개였다. 첫째, 김대중을 석방하라. 둘째, 계엄을 철폐하라. 딱 이거 둘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피켓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는 없었다. 상업영화를 만들면서 굳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광주 시민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실패다. "전두환은 살인마다." 이 한마디를 아무런 정치적 위험을 느끼지 않고 방송에서 말할 수 있는 것. "화려한 휴가"는 그러지 못했다. 죽어간 사람들과 가족들의 고통, 시민군의 동지애와 처절한 전투를 영상으로 옮겨내려 애쓴 흔적은 보이지만, 그게 "전두환의 짓"이라는 언급은 없다. 상징은 있었지만. 전두환이 영화 전반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광주 사건은 굳이 픽션이 없어도 한편의 드라마가 되는, 그런 멋진 영화소재이다. 감독은 카타르시스를 연출해내기에 바빴을 뿐, 사실적인 부분을 다소 놓침으로써 보다 더 완벽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보고 울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고, 옆에 있던 어떤 아저씨도 울었다. 예전에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라는 빨갱이(?) 역사책에서 광주 사건을 다루는 부분을 보다가, 그 때도 울었다. 그 울음과 어제의 울음은 달랐다. 어제의 울음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서 흘린 것과 비슷한 종류의 눈물이었다. 역사책을 읽으면서도 울 수 있는, 그런 눈물을 영화로 부터 기대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제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허튼 소리를 하면서 극장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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