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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문화예술평론/영화평

<시간> 김기덕, 모든 걸 변하게 하는 시간이



시간 (2006)

TIME 
8.4
감독
김기덕
출연
성현아, 하정우, 박지연, 김성민, 서영화
정보
드라마 | 한국 | 98 분 | 2006-08-24
글쓴이 평점  



최근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전 작품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2012. 9). 2006년 한참 영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을 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나에게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그 때 하정우•성현아 주연의 <시간>에 대한 리뷰도 남겼다. 이 리뷰는 2006년 당시에 가볍게 쓴 글인데, 최근 이 글 때문에 블로그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나도 조금 의아하다. 그러나 그냥 제목만 보고 들어온 블로그에서 한 분이라도 더 통찰을 얻어가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개조'했다(2012. 9).  

 

얼굴이 명함이라는 말이 있다. 유명한 스타들, 예를 들면 이병헌이나 장동건이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자기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그냥 얼굴이면 된다. 만약 이들에 대해서 더 궁금하다면, 돌아서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김기덕이라는 감독은 이름이 명함이다


김기덕은 <파란대문>(1998), <섬>(1999) 등의 영화로 근근히 이름을 알리다가 2002년 <나쁜 남자>로 서울 기준 약 30만 명을 동원한 스타감독이 되었다. 아니, '스타감독'이라는 칭호보다는 문제적 감독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당시 영화 평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쁜 남자>를 반여성적인 영화라고 질타했고, 특히 동국대 유지나 교수는 그를 두고 "백해무익한 감독"이라고 말했다(개인적으로 나는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김기덕 작품에서 여성의 비중은 다른 감독에서 그것보다 높은 편이다. 물론 여성의 심리묘사도 탁월하다). 그 이후에도 <빈 집>, <사마리아>, <숨> 등을 연출하며 김기덕 감독은 한국 작가주의 감독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잡는다. 이런 모든 프로필은 잠깐의 구글링만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이거였다.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다. 


 

먼저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약간의 스포일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지우(하정우: 당시만 해도 신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물론 연기는 일품이었지만)와 세희(박지연: 이 영화에서 세희의 역할은 완벽하게 소화했지만, 이후 연기활동 중에 적어도 내 머릿 속에 남는 역은 없다.)는 오랫동안 사랑한 사이다. 지우는 세희를 사랑하지만, 가끔씩 예쁜 여자를 쳐다보는 본능은 어쩔 수 없다. 세희는 그런 지우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우는 피곤해한다(참고로 성형하기 전의 세희도 굉장히 예쁘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설정이다. 


세희는 완전히 지우가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성형수술을 하고, 새희(성현아, 철자에 주의하라, 세희/새희)가 되어 지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지우는 새희와 사랑에 빠진다. 지우는 세희가 아닌 새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새희는 '세희'(박지연, 성형 전 자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말한다. 


감독의 말도 한 번 들어보자. 다음 글귀는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김기덕 감독의 메모이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본능이다.
시간을 견디는 것이 인간이다.
반복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 사랑이다.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다.

여기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오랜 만남으로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라 설렘이 식었고 몸이 식었고 열정이 식었고 그리움이 식었다.

2006년 1월 김기덕


이 짧은 글귀 속에는 세희가 새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간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은 새로움 앞에서 무뎌지고, 세희는 "시간을 극복"하고 싶어한다. 보통의 경우 오래된 연인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는 행위를 인정한다. 세희는 지우의 '본능'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바꾸는 실험을 통해 지우의 마음을 알아내고 싶은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세희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형을 했다는 사실이다. 굳이 말하자면, 김기덕의 포인트는 '성형'이 아니라 '자아'에 있다.


이런 파격적인 선택은 예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민을 만들어 낸다. 


지우가 사랑하는 것은 세희인가, 새희인가? 

둘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의미인가, 다른 의미인가? 


마지막에 새희가 세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 물론 여기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장면 자체로 섬뜩하다. 자기가 자기의 가면을 쓴다는 설정이다. 성형 전의 자신의 가면을 쓰고, 새희는 지우에게 세희를 사랑해달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타인을 하나의 개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분열적 자아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미 자아가 분리된 상황에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김기덕은 그 지점을 포착하여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 상황에서 저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놀란 지우는 새희로부터 도망가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를 입게 된다. 세희 혹은 새희의 욕망이 지우를 죽였다(그의 죽음 여부는 영화상으로 명확치 않다). 새희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예쁜 세희를 새희로 만들어 주었던 성형외과 의사(김성민)은 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몰라보게 해드릴까요? 그렇지만 다시는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없어요."



성형외과 의사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가장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인물이다. 


비중은 적지만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지우가 의사를 찾아와서 화를 낼 때에도 그는 균형 있는 일반인 답게 지우를 꾸짖는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온 새희에게는 따뜻하게 말한다. 새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새희: 나 사랑해요?

지우: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좋아.

 

지우는 새희가 세희인 줄을 모르고 새희와 하룻밤을 보낸다. 이 대사는 이와 같은 설정 속에서만 빛을 발한다. 만약 지우가 그냥 사랑한다고 했으면, 관객들은 그냥 지우를 "어쩔 수 없는 남자" 정도로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답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특히, 


<시간>에서 새희(성현아)의 캐릭터는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아의 이중성과 히스테리, 그리고 시간의 무서움을 한 몸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우는 비교적 정상이다. 그러나 결국 새희의 마술적 힘에 이끌려 지우도 자신을 잃어간다


즉, 정상인이 비정상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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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주요한 코드 중에 하나는 "파멸"이 아닐까, 생각된다. 멀쩡한 인간, 정말로 정상적이다 못해 아름다운 사람들이 끝까지 파멸하는 과정. 그 속에 김기덕 영화가 있다. 멀쩡한 형사가 파멸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사마리아>, 못된 영화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나쁜 남자>. 이미 그의 영화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불편해진다". 


김기덕은 말한다. 


"내 영화는 독립 영화가 아니다. 저예산 영화이다. 내 영화는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꺼리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늘어 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새희가 자신의 히스테리(히스토리가 아니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철저하게 묘사한다. 당시 성현아는 이런 저런 스캔들로 인해(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필요하신 분들은 검색) 일종의 "힐링"이 필요한 배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연기, 무섭도록 히스테릭했다. 이승연이 정신대 할머니를 컨셉으로 한 누드사진을 찍고 사실상 활동을 중지했을 때 그녀를 세상 밖으로 꺼낸 것도 김기덕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이것을 의도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그는 배우들에게도 힐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내가 느낀 김기덕 감독 영화의 특징은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 특유의 수미상관 구조

2) 장소의 반복

3) 인격의 다중화, 혹은 다중인격의 일인화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좋은 소설가란 가급적이면 상황을 머릿 속에 그릴 수 있도록 잘 묘사하면서도 결론은 적게 내리는 사람이라 했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의 의미에 대한 결론을 유보하도록 한다. 가급적 독자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교훈은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때만 유용하다. 감독의 역할은 그림을 그리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김기덕이 던진 시간의 의미. 성현아의 대사로 답을 대신한다. 


"시간이 무서웠어. 모든 걸 변하게 하는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