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강준만 교수가 발간한 월간 <인물과 사상> 10월호에 개제된 내 태백산맥 서평이다. 당시 투박한 내 생각을 담고 있다. 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냥 게재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쓴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태백산맥”에의 도전
나는 좌·우라는 개념을 안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무식한 놈이다. 하지만 무식을 탈피해 보려는 처절한 노력을 나름대로 한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2학년이 우리 나라 문학사의 기념비적 소설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태백산맥”을 어려워서 못 읽는 것은 스스로 창피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인간과 사회, 문화에 관한 폭넓은 철학의 기초를 중요 과목으로 배우고 있는 경우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절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난 여름방학이라는 보물 같은 시간만 고대해 왔다. 학교 공부를 병행하면서 교양과 안목을 넓히는 공부를 하는 것은 정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막상 여름방학이 되었지만, “태백산맥”이 쉽게 잡힌 것은 아니었다. 바로 몇 해 전에 읽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좌익이 뭔지 빨갱이가 뭔지 짐작도 못하던 시절에 한국의 근현대사가 무르녹아 있는 “태백산맥”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처지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알 만큼 알아야 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태백산맥” 하나 읽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맘먹고 다시 “태백산맥”을 잡긴 잡았다.
어렵고, 약간 이해가 안 가고, 등장인물이 많았고, 게다가 처음에는 회상하는 부분이 많아, 그때 사건을 잘 모르는 나에게는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꼴에 문학 교과서 좀 읽어 보고 국어 책에서 이야기되는 소설 정도는 다 읽어 보고 했던 것들이 약간 도움이 되었던지, “태백산맥”의 그 견고하고 완벽한 상징성이 부여된 등장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실성의 위대하고도 섬세한 터치를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 작품들에 버금가는 상징과 갈등의 구조가 인물들 사이의 대화와 행동을 범세계적인 것으로 어찌 그렇게 쉽게 일반화시켰는지, 정말 놀라운 구성력이 아닐 수 없었다.
빨치산의 역사적 배경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끔 생각해 본다. 그럴 때마다, 전혀 결론 같지 않은 결론, `알 수 없다'는 허무한 답만이 머리를 빙글빙글 맴돈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비록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위험한 투쟁은 아니지만, 단지 사느라고 많은 노력을 들인다. 그런데 불과 50년 전의 이 땅에는 젖 먹던 힘까지 써서 항상 죽도록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시대가 있었다. 사실 거기에 비하면 지금 우리 사는 곳은 거의 천국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IMF로 실업 대란이 일어나서 국가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주위에서 굶는 사람을 보는 것은 흔치 않으니, 게다가 신문에서도 누가 굶어 죽었다는 소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현대인보다 더 많은 노동을 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았을 과거에는 왜 그토록 기아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그런데도 과연 가난은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자 숙명이라는 식의 논리가 먹혀들어가는 것일까?
그들이 가난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전자는 한국 근대와 현대를 걸쳐 끈질기게 사회의 모순으로 남아 있으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소위 한국적 봉건 관계는 서양의 그것 못지않게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잘 들을 수 있는 이른바 착취와 피착취 관계가 당시에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년 내내 뼈빠지게 농사지어서 반은 지주에게 바치고 남은 반마저 이런저런 명목의 세금으로 착취를 당하면서 남는 건 긴 겨울을 나기조차 어려운 소량의 양식 뿐……. 만약 그런 사회에서 누군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온다. 완전한 평등의 세상에서는 굶주림도 없고, 착취도 당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 몰수해서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라고 속삭인다면 귀가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생명의 극한까지 내몰리면서도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했던 사람들, 그들이 빨치산이었다. 맹세컨대, 내가 그런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난 좌익 활동을 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글을 보고 날 이른바 색깔이 수상한 놈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논리는 80년대 이후 거의 붕괴된 상태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를 닮은 국사 교과서
사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내 나이로 느낀 숱한 회의들은 지울 길이 없었다. 이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48년부터 53년까지는 6·25를 제외하고는 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엉성하게 다루어지는 부분 중 하나이다. 물론 현대사의 마지막에 가까운 부분이기 때문에 항상 시험 범위에 빠져서 읽어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책을 쓴 시각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조선일보만큼이나 보수적인 듯하다. 국사 책은 공산주의자들을 국가를 전복하려는 무리들로만 보고 있지, 그 당시 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갈등이나 굶주림 같은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기본적으로 객관과 균형의 시각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당시 순박한 농민을 그런 목숨을 건 투쟁으로 유도한 그 엄청난 힘을 무시해 버린 국사 책이란 세상에 대해 막 눈을 뜰 세대가 배울 일국의 국사 책으로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국사 책은 왜곡과 진실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당시 한국의 정부를, 다시 말해 기득권층의 논리와 행태를 지독할 정도로 옹호한다. 만약 “태백산맥”을 읽지 않았다면 나도 "우리 나라 좋은 나라, 공산주의자들 나쁜 놈들"이라는 단순한 인식을 지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교과서에 단 한 줄로 묘사되어 있는 농지 개혁법만 해도 그렇다. 일제 때 뼈빠지게 일해도 착취당해서 배고픔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농민들은 해방이 되자, 친일 지주들의 논을 이제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사실 북한에서는 1946년에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물론 그것은 현대에 와서 북한 체제의 완벽한 실패의 근원이 됐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가장 이상적인 처방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한 정부는 친일 지주와 기득권 세력의 편을 들어 그 법을 만드는 것을 질질 끌었다. 친일 세력과 지주, 기득권 세력이 우리 위대한 남한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었으니 그 지지 기반을 어떻게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결국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내세운 좌익 세력이 농민들에게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음을 과시하여, 민심이 아예 정부를 떠나 버리게 된 극한의 상황에 이르러서야 한국 정부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유상 매입, 유상 분배의 농지 개혁법을 만든다. 그러지 않아도, 죽어라 일해도 먹고 살기도 어려운 소작인들이 쌀을 주고 농토를 사는 그런 법을 만든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안 농민들 중 "만세다, 이제 우리도 돈만 있으면 토지를 살 수 있다"(고교 국사 198쪽)고 좋아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정부는 또 농민들에게 토지를 배분해 주기 위해 농지 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이듬해에 일부 수정되어 실시되었는데, 그 원칙은 3정보를 상한으로 하여 그 이상의 농지는 유상 매입, 유상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때까지 소작농으로 시달렸던 많은 농민들이 자기 농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자기 농토를 가진 농민이 있긴 있었다. 그 법은 지주들이 자신의 땅을 빼돌릴 시간을 충분히 주면서 허울뿐인 민심을 얻기 위한 보여 주기식 법이었기 때문에 실효가 그다지 많진 않았던 것 같다.
분단을 상징하는 염상진과 염상구
“태백산맥”은 여순 반란 사건으로 시작하여 6·25 전쟁 직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축을 염상진과 염상구 형제로 잡아 놓았다. 사실 이 두 형제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조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의 관계가 조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염상진은 공산주의 이념에 물들어 빨치산 활동을 하고, 염상구는 청년단장으로 빨치산을 때려잡는 극우적 인물이다. 이들은 형제이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불편한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염상진은 매우 긍정적 인물로, 염상구는 그 반대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1950년대까지는 북한의 정권에 도덕성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소설의 중심축은 바로 소작농과 지주의 갈등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 공산주의가 싹틀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는 국제적 흐름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시절의 공산주의는 새로운 지식층의 마지막 남은(보다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비상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때 우리 나라의 상황은 위의 유토피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지옥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착취 계급에게는 유토피아였을지 모르지만.
제주도의 4·3 항쟁은 이 소설의 발단을 이루고 있는 여순 반란 사건의 계기가 된다. 무려 8만 명의 제주도민의 목숨을 앗아 간 4·3 항쟁 이후 김지회 등 좌익 세력이 일으킨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많은 좌익 세력이 투쟁을 위해서 입산을 했다.
소설 속에서는 염상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냉철한 판단력과 침착한 성격으로 소설 속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인물인 염상진은 빈농 출신이다. 이와 같은 경우로는 하대치라는 인물을 들 수 있다. 염상진과는 달리 하대치는 단단하고 야무지며 화끈한 성격의 인물이다. 하대치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좌익 활동을 해야 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해답을 던져 주는 인물이다. 원래 순박한 농민들을 총 들고 입산하게 한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붕괴되기에 이르렀지만 당시에는 최선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을 입증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물이 바로 정치인들의 색깔론 공작이 아닐까? 당선을, 혹은 집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일부 정치인들이 특정 인물을 `빨갱이'라고 원색적으로 욕하는 것과 한때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선거의 결과가 좌우되기도 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결국 힘든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서글픈 투쟁들,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행하면서도 그것을 한꺼번에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좌익'이라는 무서운 칭호가 먼저 살았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태백산맥”에는 그 당시 깨어 있던 지식인으로 김범우, 손승호, 서민영을 제시하고 있다. 중립적 민족주의자인 김범우, 좌익 활동을 하다가 중립으로 전향했다가 다시 빨치산을 하게 되는 손승호,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방향의 민족주의를 제창하는 서민영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는 또한 “태백산맥”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주의(ism)'란 대다수 민중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셋은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란 남한의 이념이 우리 민족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따른 하나의 산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분열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일본의 36년간의 통치로 인해 약해진 국력과 강대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혼합하여 빚어낸 아픈 산물이 바로 민족 분열인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분단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념(ideology)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염상섭의 만세전 이 식민지 상황에서 무능하고 염세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태백산맥”에서는 그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층을 지식인이라고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김범우, 손승호, 서민영 중 부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은 없을 뿐더러 서민영 같은 경우는 김구 선생과 같은 민족주의자로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두 명이 좌익으로 전향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역사적 격랑 속의 남녀 관계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즐거움은 연애 소설은 아니지만 남녀간의 좋아하는 혹은 사랑하는 감정을 대단히 한국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들은 책장이 가장 잘 넘어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조혼 풍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서인지, 대부분의 인물들이 기혼으로 나온다. 기혼인 인물들, 특히 여성이 입산한 남편을 걱정하는 그 투박한 마음도 그렇지만, 정하섭과 소화의 사랑하는 부분은 정말 어느 영화 장면 못지않은 표현을 구사한다. 어설픈 헐리우드식의 화끈한 사랑이 아닌 한국적인 기다림의 정서가 잘 표현된 것 같았다. 정하섭과 소화 같은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경우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하섭은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악덕 지주의 아들이면서 좌익 활동을 하는 예외적 인물이고, 소화는 무당의 딸이다. 이들에게는 특별한 상징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정하섭이 마지막에 월북한 것으로 소화와 영원한 이별을 선택함으로써 분단의 아픔을 상징한다고 보면 모를까.
그런 사랑의 마지막을 빨치산 활동으로 승화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외서댁이다. 그녀의 남편이 빨치산이라는 것을 흠잡아 염상구는 그녀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다. 그렇게 해서 외서댁은 임신을 하게 되고, 저수지에 빠져 자살하는 데 실패해서 친정으로 돌아간다. 한편 강동식은 이를 알고 염상구를 죽이려 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자신이 죽음을 당한다. 염상구는 후에 쌀 10가마니라는 많다면 많은 양으로 외서댁에게 보상을 한다. 외서댁은 후에 빨치산 제2 세대로 편입하여 전사가 된다.
그 시대 상황은 집에서 혼자 애 보는 아낙까지 총 들고 나서서 싸울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시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한다. 사랑의 구도마저도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가 허우적대는 서글픈 한 시절에 대해 겪어 보지 않은 자의 유일한 탈출구는 침묵일 뿐이기 때문이다.
6·25와 역사의 아이러니
“태백산맥”에서 묘사된 것 중에서 잔인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된 부분을 꼽으라면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비리와 부정이다.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비리와 부조리 투성이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은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권력과 권력을 남용해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뿌리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만연되어 있는 듯 하다. 과거의 그것과 절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그때에 비해서 규모나 횟수 면에서 많으면 많지 적지 않다. 그래서 IMF라는 심각한 국난을 맞게 된 것이기도 하다.
“태백산맥”에서 나타난 6·25 전쟁은 처절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는 다른 시각이라고나 할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세뇌당했던 공산당에 대한 편견과는 거리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6·25 전쟁의 발발부터가 그렇다. 지금 논리로 분석해 보자면 북한의 괴뢰군이 새벽을 타서 남한을 침공했다는 것 하나 뿐이지만, 사실 그 내막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숨겨져 있다. 역사에 남을 어떤 사건을 접할 때는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 결과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6·25 전쟁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 해도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 결과 어떤 초등학생도 6·25를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후 문맥의 이해에 의한 6·25의 접근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 나는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지만, 단 한 번도 6·25 전쟁에 대해 비판이 조목조목 담겨 있는 글을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6·25 전쟁이 북한이 일으켰다는 증거를 5∼6가지 거창하게 나열한 것이 거의 전부인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전쟁을 가장 올바르게 비판했다고 일컬어지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 (조금밖에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이라는 책과 “태백산맥”에서 작가 조정래님이 보여 준 시각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둘 다 한국 전쟁의 기원을 당시 모순이 누적될 대로 누적된 한국의 사회적 배경을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은 그러한 모순된 배경이 가져온 작은 불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6·25 전쟁으로 인해 입산한 빨치산들은 비로소 인민 해방의 날이 왔음을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만약 그때 한국이 공산당에 전복됐다면 어땠을지 정말 끔찍하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이론으로 결론이 났다. 북한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대다수 국민이 기아에 허덕이고 개 줘도 안 물어갈 자존심 세우면서도 식량을 구걸하는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아닌가?
그와 반대로, 비리와 부정에 가득 찬 한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 사회로의 발전을 좌절시키고 개발 독재를 빙자한 `유신 독재'로 온갖 인권 유린을 다 하고도, 또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온갖 부정 비리를 저지르는 등 군사 정권을 30년간이나 유지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바탕으로 세계가 주목할 만한 발전을 했다. 어디 북한에 비할 바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이런 아이러니가 `공산당=나쁜 놈'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주는 건 아닐까?
처절한 빨치산 투쟁의 의미
어쨌든 그들은 인민 해방을 표방하며 남하하여 원했던 대로의 정책을 실시한다. 부분적으로 공산당에게 전복당한 지역의 임의적인 것이었지만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그때부터 공산주의의 모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 토지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아, 모든 재산을 공공의 재산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곡식 한 톨 한 톨,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의 마리수까지 모조리 셈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작인들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인민 해방을 외치면서도 한 편으로 공산주의를 불신하게 되었다. 아무리 악독한 지주라도 개인의 재산을 노골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더 분노했다.
그런 정책들을 한창 실시하던 중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하여 다시 북한이 열세에 몰린다. 하산한 빨치산들은 다시 입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우세할 때 빨치산에 새로 가담하거나 지원한 사람이 많았다. 살인죄보다 좌익이 더 무서운 죄였음을 감안하면 그들이 무사하기를 기대하느니, 하늘에 가서 별을 따 오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새로운 좌익 세력은 모조리 입산을 하게 된다. 이들이 이른바 빨치산 제2 세대이다. 양적으로만 부풀릴 대로 부풀려진 빨치산은 결국 실질적 전력 약화를 가져왔다. 빨치산의 투쟁은 지원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무기들을 뺏어 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태반이 비무장인 상태에서 양적 증가로 인하여 오히려 많은 빨치산들이 목숨을 잃었음은 물론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어 세 번 죽는다는 빨치산의 처절한 투쟁 장면은 이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이 험난한 투쟁은 인권적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를 느낀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면서도,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서북청년단 같은 경우에는 북한에서 토지 개혁 이후 땅을 뺏긴 이들이 월남해서 참여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것이 곁들여졌다고 이해된다. 나머지는 있는 자들 즉 부르주아 계급의 기득권 유지라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짐작된다. 남들의 생존권, 최소한의 생계 유지권을 박탈하면서까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계층에 의해서 국가 정책이 좌우됐던 것이다. 사실 우리 현대사의 아픔들은 모두 이런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수구 기득권 세력의 끝없는 자기 보호 욕망에 싸우다 죽어 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의 씨앗이 바로 지금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 사건으로는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군 신원리 학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정말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국가도, 민족도, 하다못해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급하게 미봉책으로 마련한 국민 방위대가 10여만 명이 얼어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무책임함을, 한 마을 사람들을 좌익 활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완전히 학살할 수 있는 무서운 논리를 보여 준다.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 없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태백산맥”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그 처절한 춘궁의 투쟁을 읽고 있을 때 친구는 반찬이 맛이 없다면서 밥과 반찬을 버리고 있었다. “태백산맥”의 이야기는 과연 언제의 이야기였단 말일까. 최소한 내가 보는 청소년은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매우 무관심하다.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 얘기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위험하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좋게는 바라볼 수 없는 현상인 듯하다. 가수를 향해, 얼굴 잘 생긴 배우를 향해 열광하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태백산맥”을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자기 인식이 부족한지 스스로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백산맥”의 역사적 교훈
이제 글을 서서히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길게 언급을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너 혼자 몰랐던 사실을 나열해 놓은 것뿐"이라는 비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보는 사람들은 “태백산맥”이 주는 감동에는 공감을 형성하면서 올바른 자신 혹은 세계(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가지려는 노력은 부족한 듯하다. 그런 인식이 올바르게 서 있다면 우리 나라의 음식물 쓰레기는 지금의 반의 반으로 줄었어야 됐다.
하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의 논리로 30∼40년 이상을 살아 오면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바르게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비판을 하기가 두렵다. 물론 내 경험과 인식이 그들에 비하면 철없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은 나이, 성, 지역 등 상대적이며 단순한 비교 우위의 시각으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소설가 안정효님의 5·18을 다룬 소설 태풍의 소리 를 읽을 때와 비슷했다. 지금 선인들의 피에 어떤 보답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최소한 그들을 올바로 보고 기억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유토피아적 사회는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 비하면 IMF를 감안하더라도 지금은 유토피아이다. 그들은 무위도식하면서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노동을 하는 것은 아예 전제로 하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많이 먹고 일하지 않아 찐 살을 뺀다고 다이어트 산업은 해가 갈수록 급증하고 있고, TV에서는 삐쩍 마른 사람만을 예찬하는 시대이다. 역상황의 역상황, 즉 반전에 반전이 되어 버릴 정도로 안정한 생활을 찾았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에 문제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 사는 세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전에 싸우다 간 수많은 영혼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교과서 깊숙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기득권 세력의 논리들, 그 가증스런 두 얼굴을 벗기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역사 책에서 알려 줄 건 다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추태에도 우리는 전혀 대응할 도덕적 근거가 없다. 먼저 우리부터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고, 그 후 일본의 역사를 운운하는 게 순서인 듯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학 교과서에 널려 있는 이인직, 이광수, 주요한 등 친일파들의 글을 빼더라도 “태백산맥”의 한두 쪽 정도는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을 위해서 친일했다는 이광수의 무정 이 한국 장편 소설의 효시라 한다면, 장편 문학의 꽃으로서 해방기부터 한국 전쟁을 이어주는 역사적인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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