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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역사문화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다섯가지 질문

대학 4학년때 썼던 레포트를 수정한 글이다. 학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지난 문제의식을 다시 보면, 더 새롭다. 


1. 동학은 살아있는 역사입니까?

역사를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살아있는 역사와 박제화된 역사. 살아있는 역사란 우리의 주변에서 거론되며, 실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반면, 박제화된 역사란 현대인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며, 현재의 삶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역사를 말한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우리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환기되고 인용되는 살아있는 역사이며, 갑오농민전쟁은 박제화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박제화된 역사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무도 박제화된 역사를 두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비판을 하지 않는다. 동학의 경우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동학에 관련된 논문을 6편 이상 읽었지만, 동학의 사상을 두고 순진한 이상주의라든지, 근원적 한계를 지닌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논문은 없었다. 신문 사설을 한 번 보자. 그것이 어떤 신문이라도 좋다. 거의 모든 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누군가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역사이다. 현재 진행형인 사건에 대해서 핏대를 세우면서 비판하던 사람들도 박제화된 역사 앞에서는 그만 그만한 논평을 던질 뿐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볼셰비키의 공산혁명과 같은 경우는 갑오농민전쟁보다 오래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사건이다. 글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언급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의미들로 인해 이 사건들에 대한 담론은 더욱 풍부해 진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이 한국의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동학에 관한 사회적인 담론이 더욱 풍부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한국정치사상사>의 발표 주제로 동학을 택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동학은 종교인가, 사회개혁사상인가? 전봉준은 동학교도가 맞는가? 동학이 반외세, 반봉건의 슬로건을 내걸었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갑오농민전쟁은 우리의 정치적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리가 묻고 답해야 할, 다시 말해 만족스러운 답이 도출되지 못한 질문은 아직도 산적해 있다.

동학을 숨쉬는 역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동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논문 작성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번 학기에 15개 이상의 보고서를 쓰면서, 항상 똑 같은 포맷으로 글을 썼다. 논문이라는 특수한 형식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봤지만, 내 글이 완전히 논문이라는 틀에 맞추어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논문의 형식을 그대로 빌리면, 동학에 관하여 정리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듯 했다. 연구의 목적을 충분히 전달하기만 한다면, 그 형식은 어떤 것이라도 좋지 않을까?[1]  

 

2. 누가, 왜 동학을 만들었습니까?

1860년 동학이 창시되고부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우리 나라의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 당시는 세도정치의 결과로 왕권이 실추되었고, 열강의 통상압력이 강화되었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과 왕권강화를 통해 이 난국을 해쳐나가려고 했으나, 민생은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농민은 막중한 과세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어지러운 시대에는 종교가 절실해지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에 사실상 국교의 기능을 수행해왔던 유교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할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만약 유교가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었을 것이다.

 

외적들로 말하면, 한갓 재화와 색만 알고 다시 조금도 사람의 도리라고 없으니 이는 곧 금수일 뿐입니다. 사람과 금수가 화호하여 같이 떼지어 있으면서 근심과 염려가 없기를 보장한다는 것은, 신은 그 무슨 말이지 알 수 없으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바의 다섯째입니다.(최익현, 국역면암집)

 

위정척사사상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최익현의 말이다. 유교보수주의자에게 개화라는 것은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금수와 같은 외적들을 배격할 뿐 국내에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어떤 노력을 해 나가야 할 지에 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통적 유교 지식인들은 외유내강의 어려운 상황을 유교 질서의 강화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것 같다.

동학은 이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우리 내부의 정신적인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하였다. 동학은 1860년에 수운 최제우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최제우는 국내외의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19세기 한국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은 문화와 정신이 부재하다고 생각하고, 백성을 평안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2] 그의 문제의식은 문화와 정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치료법 역시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사상이었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와 심지어 일부 서학까지 받아들여 내부의식의 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최제우는 후천개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믿음을 무이위화無爲而化라는 말로 간명하게 표현하였다.[3] 최제우는 유교와 불교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무극개운無極開運, 즉 그 운수가 다해서 끝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데올로기처럼 작용하고 있는 유교의 원리들을 비판했다. 유교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근거는 시천주,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이었다. 그의 이론이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만민평등을 내세웠던 시천주 사상과 2대 교주였던 최시형 30년간의 포교활동 덕분이었다. 게다가 최제우의 종교적 카리스마도 한 몫을 거들었다. 그는 항상 검소하고, 누추한 옷을 즐겨 입는 서민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민중[4]적인 관심과 행적은 그의 종교적 영향을 강화시켜주는 커다란 동인이었던 것이다.[5]

그의 사상은 소박하고, 단순한 언어로 표현되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어떤 종교라도, 신도가 외면하면 종교로서의 위상을 발휘할 수 없다. 동학은 만민평등사상과 민중적 성격, 그리고 최시형의 포교활동으로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제우는 기존의 성리학적인 질서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동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호는 조선이요

읍호는 경주로다.

() 동방이 생긴 후에

이런 왕도 또 있는가

임금이 공경하면

충신열사 아닐런가[6]

 

김만규 동학의 사상적 성격이 종교적 조직과 의식을 통한 사회운동이요 정치운동이었다는 데에는 큰 이론이 없는 것 같다[7]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동학의 국제질서관은 창도기의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배타적 쇄국주의로부터 개화주의적 근대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초대 교주인 최제우의 사상을 살펴보았을 때에는 사회의 개혁사상이라기 보다 혼합종교로서의 위상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신복룡(『한국정치사상사』,1997)의 해석은 순수한 동학의 정치적 성격을 민권, 국가, 민족주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상 최초의 수운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가 않다. 사실상, 최제우는 만민평등사상을 설파함과 동시에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민평등과 군신관계가 어떻게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치밀한 설명을 덧붙이지 못하고 있다.

동학의 창시 이념은 다분히 이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서민적이었다. “우리의 도는 한울님의 이법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8]는 말에서 볼 수 있듯, 동학은 민중의 삶을 옥죄는 문제들을 고도의 윤리성에서 찾으려고 했다. 초기의 동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같은 당위적인 윤리였을 뿐, 현실개혁은 아니었다. “동학이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주장은 1894년에 일어난 보은집회나, 갑오농민전쟁 등의 농민봉기와 동학사상을 구별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학은, 내우외환의 위기로부터 민중을 구제하려는 정신적, 윤리적 대안으로서 수운에 의하여 창시된 민족종교였던 것이다.

 

3.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동학도가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라는 것이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따지고 보면, 근저에 만민평등 사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항쟁에 참여한 민중들 중에 다수가 동학교도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농민전쟁의 주도자인 전봉준은 스스로를 동학교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또한, 세도정치와 일본의 수탈 때문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이 항쟁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며, 갑오농민전쟁도 이와 같은 민란의 연속이라는 견해도 있다.「동학의 정치사상」[9] 에서 신복룡의 주장을 들어보자.

 

민란이라는 흐름에 동학사상이 합류함으로써 갑오농민혁명에 동학이 다소 착색되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논지는 어떠한 일차 사료로도 전봉준이 접주(接主)이기는커녕 동학교도였다는 사실조차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로서 뒷받침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박명규의 논증과도 상당부분 일치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을 내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였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그가 과연 동학 교도였는가 하는 사실 자체가 학계의 논란거리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중략) 그는 종교로서의 동학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10]

                      

전봉준은 최소한 최제우, 최시형의 사상을 따르는 동학교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의 자유 획득에만 국한하고 그것조차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로 수행하려는 최시형의 입장에 반대했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도들, 즉 남접南接의 주도세력이었다.[11] 정작, 그의 관심사는 피폐해진 민생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이것은 동학의 보국안민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지만, 현실개혁에 소극적인 동학의 상층부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동학은 교도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교조신원운동 등을 거치면서 여러 분파로 나누어졌다. 동학의 내부에는 농민, 향반, 백정, 망나니 등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이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분열은 이미 예상되어있던 수순이었다.

동학의 분열은 무엇보다도 교조신원운동[12]을 통해서 명확히 드러났다. 1892 10월 동학의 지도부는 교단의 조직을 통해 교도들을 공주에 모이게 하고 이 자리에서 청주감영의 감사 조병식에게 교조에 대한 인원과 교도에 대한 폭정을 금지해 달라고 올렸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학지도부는 광화문 복합상소를 통해 고종에게 직접 교조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각기 집으로 돌아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고종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다.[13] 복합상소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학교도들은 왕권에 대한 반란을 꿈꾸지 않았다. 최시형도 교조신원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때를 기다리자고 일갈했다. 적어도 이때까지의 동학은 이른바 사회개혁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동학의 사회개혁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남접세력에서 주도적으로 나타났던 사상이었다. 남접세력은 주로 호남지방의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호남은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일제와 국가로부터 많은 수탈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경제적 소외지역이었다.[14] 이들은 사회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남달랐고, 보은집회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민감한 정치적인 구호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동학세력의 급부상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인해 중단했다.[15]

일단 역사의 자취를 여기까지 살펴보는 것으로써,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관계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은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등극 이후에 다양한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모인 거대한 종교집단이 되었고, 이들은 일정한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유달리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던 남접세력이 보다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으로 변모해 나갔던 것이다. 사실상 농민전쟁에서 동학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농민전쟁의 주도자인 전봉준은 동학의 조직력과 교도의 수를 바탕으로 농민전쟁을 준비과정에 철저히 활용했던 것이었다. 그는 종교로서의 동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피폐해진 민생을 살리는 것뿐이었다. 심문과정에서 나타난 전봉준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보자.

 

 물음 : 너는 평소 어떤 학문을 하고 잇는가?

 대답 : 공자와 맹자를 공부한다.

 물음 : 동학에는 언제부터 관계했는가?

 대답 : 3년 전부터.

 물음 : 어떤 것을 느끼고

 대답 :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의 생각에 끌리고 있던 차, 동학이 김실도라는 사람이 동학의 책자를 제시한 일이 있는데, 그 속에 대체정심이라는 것에 공감해 입당했다.

 물음 : 정심이라는 점은 동학당에 한한 것이 아닌데, 무엇인가 따로 너의 입당을 촉구한 것은 무엇인가?

 대답 : 단순히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만이라면, 물론 동학당에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동학당은 소위 경천수심이라는 취의에 따를 때는 정심 외에 협동일치의 뜻을 포함하고 잇으므로 결당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자의 일치는 간악한 관리를 제거하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음 : 재차 봉기 때에 최 시형과 의논했던가?

 대답 : 그와 논의하지 않았다.

 물음 : 최법헌(최시형으르 가리킴)이 두목으로서 동학당을 규합했는데 왜 의논하지 않았던가?

 대답 : 충의가 각각 그 본심인데, 하필 법헌과 상의한 후 이 거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16](굵은 글씨는 필자가 강조)

 

 그는 간악한 관리를 제거하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으면하는 마음에 동학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전봉준의 현실개혁의 움직임은 기존의 동학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런 동학의 움직임에 대하여 강렬한 거부를 나타냈다. 그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혁신파에게 던지는 문장은 거의 비판이 아니라 욕설에 가까운 수준이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국가의 역적이며, 동문의 난적이다[17]라는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원래의 동학 이념이 반국가적이지 않으며,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려는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도 없지만, 섣불리 이 둘을 뭉뚱그려 이해하려는 시도 역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은 박제화된 역사이다. 박제화 작업이란 과거에 동학교도가 반외세, 반봉건을 주장했다는 식으로 갑오농민전쟁을 폄하해 버리려는 시도이다. 이쯤에서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학은 서민적이고, 안락한 피신처 같은 종교였다면, 갑오농민전쟁은 동학 내부의 좌파(헤겔의 제자를 헤겔 좌파 헤겔 우파로 나누는 것처럼, 여기서 편의상 동학 좌파의 개념을 사용하도록 하겠다)가 급성장하면서 사회적인 부조리와 부패에 저항한 역사적[18] 사건이었다. 맑스가 헤겔의 제자였지만, 이 둘의 사상이 일치하지 않듯이, 동학의 후예인 동학 좌파(?) 역시 원래 최제우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4.갑오농민전쟁은 맑스의 물질론적 역사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80년대 초반에 씌여진 『동학혁명의 연구』(1981, 백산서당)를 검토하던 중 나는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동학은 이조 철종 12, 최수운 선생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민족독립의 정신적 토대를 건설하고 아울러 사색당쟁과 외척세도로 말미암아 유교특권정치를 지양하여 삼정의 문란으로부터 민생도탄을 구제하려는 정신적 혁명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략) … 이조말기의 사대적인 봉건성을 지양함으로써 민족독립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굵게 표시한 글씨들을 종합해보면, 어디에선가 낯익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유교특권정치 지양하는 정신적 혁명운동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지양이라는 단어가 이 짧은 글에서 2번이나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이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역사해석방법이 얼마나 사대事大적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는 봉건제 정부가 존재한 적이 없으며, 동학은 정신적 혁명운동이라는 수식을 받을 정도로혁명적이지 않았다. 위의 글에서 자주 출몰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맑스의 물질론적 역사관에서 자주 사용된다.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을 연구할 때에 이러한 불분명한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함으로써 그 본래의 의미를 흐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용어들의 적합성과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 동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19]

맑스의 역사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생산량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라 발전한다. 그는 역사란 필연적으로 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제사회-중세 봉건사회-근대 자본주의 사회-공산사회로 발전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생산관계의 모순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 사회가 중세의 봉건사회로 넘어가게 된 것은 노예주들의 휴머니티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량의 증가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노예를 직접 거느리면서 먹여 살리는 기존의 생산관계는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과정은 혁명적으로 일어나며,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노동자의 저항으로 인해 무너진다고 그는 예언했다. 물론 이 분석은 철저하게 유럽의 역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적어도 4(자본주의)에서 5(공산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은 맑스가 예언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우며, 심지어는 불가능하다는 역사적인 실험 결과가 수두룩하다.

여기서 맑스의 역사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봉건제 사회가 없다는 것은 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이상사회가 도래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정작 맑스의 역사관에 비추어보면, 우리나라는 고대 노예제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은 맑스가 틀렸다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나라는 예외라고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반면, 일본은 전 세계적으로 봉건제를 경험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에 하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겪으면서, 봉건의 잔재들을 청산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우리도 서양의 근대를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단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 역시 메이지 유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유구하게 빛나는 눈부신 국민적 전통을 유지해온 일본에 있어서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의 국민의식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국민주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메이지유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20]

 

이 문장은 일본의 대大석학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발췌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근대 봉건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메이지유신 이전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적인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농민)은 그 이상(납세)을 넘어 국가사회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어떤 책임을 짊어져야 할 필요도 없었다.(p.495)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서민들은 오로지 정치적 통제의 객체로서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p.498)

 

근세 봉건제의 사회기구 자체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일체적 국민,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국민적 통일의식의 형성에 대한 결정적 장애물이었지만…(중략)… 토쿠가와 바쿠후의 현실정책은  통일의식이 아래로부터 성숙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했다.(p.499)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참담한 일본의 근대 봉건제도는 메이지 유신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국민에게 역사적인 희망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봉건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과 같은 혁명적인 분수령이 될만한 사건도 많지 않았다. 정치 연구자는 맑시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부르주아 혁명, 우리나라의 봉건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구분하는 방법은 통상 맑스의 역사관이 세계적으로 반영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를 봉건사회라고 지칭하고, 동학을 반봉건 혁명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봉건제가 군주와 신하의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정치적 지배관계를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역사는 명백하게 없었다. 그런데 왜 동학이 반외세, 반봉건을 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맑스에 경도되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갑오농민전쟁을 동학혁명이라고 일컫는 것도 유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동학은 갑오농민전쟁을 결속하고, 조직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했을 뿐, 그 자체에 정치적 혁명 사상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교주인 최시형은 동학 좌파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시형에게 중요한 가치는 동학의 평화적인 포교활동이었으며, 그 이상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킬 의향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동학혁명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동학에 혁명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고, 그 혁명성이 갑오농민전쟁을 가능케 했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용어를 우리의 역사에 무분별하게 도입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비판과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동학의 사상사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그린 피아골의 가을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의 제목을 몰랐다. 어느 순간에 그 글의 제목을 보는 순간, 온 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가 피아골이라니! 그림 속의 피아골은 목가적이고 평온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기억들만 가지고 있을 법한 그런 장소였다. 피아골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마지막까지 싸우던 사람들이 죽어간 장소였다. 한국전쟁 때, 2기 빨치산들이 국군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사라져간 자리이기도 하다. 『태백산맥』(조정래)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물 반, 시체 반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런 현대사의 비극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의 흔적 치고는 아버지의 그림이 너무 낭만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동학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아버지처럼 피아골을 낭만적으로 다루지는 않으리라.

이 글에서 나는 동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낭만과 신화화를 배제하려고 애를 썼다.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동학은 스스로의 정치성 민중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회개혁의 험난한 길을 나서기를 꺼려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했던 동학 좌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한국의 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학의 사상적인 의미로서 두 가지를 꼽고 싶다. 만민평등사상의 태동, 민중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종교의 새 역할. 1893년 광화문에서 읍소를 하던 동학교도들의 심정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 보았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마도 두려웠을 것이다. 국왕을 상대로 민중이 어떠한 요구를 할 수 있다라는 사상을 가능케 해준 것은 바로 동학의 종교적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 종교적 힘의 원천은 인내천, 혹은 인즉천으로 표현되는 만민평등사상에서 왔다. 한번 신분이 결정되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당신이 곧 한울님이다라는 동학의 교리는 진통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던 측면이 있었다.

 

 

 참고문헌

김만규, 『한국의 정치사상』, 현문사, 1997.

노태구, 『동학혁명의 연구』, 백산서당, 1981.

마루야마 마사오,『일본정치사상사』,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박명규, 『한국 근대 국가 형성과 농민』, 문학과지성사, 1997.

신복룡, 『한국정치사상사』, 나남출판, 1997.

최제우, 『동경대전』, 도올 김용옥 옮김, 통나무, 2004.


[1] 이런 나의 글쓰기 방식의 시도에 대해서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2] 명규, 『한국 근대 국가 형성과 농민』, 문학과지성사, 1997, p.162.

[3] 위의 책, p.172.

[4] 민중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졌다. 일반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학문적인 용어로는 좀처럼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국민이라는 단어에는 가부장적인 국가의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고, 인민이라는 말은 세계시민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민중이라는 개념은 『동경대전』(최제우, 도올 김용옥 옮김, 2004)에서 도올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레타르키아, 즉 민본성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말한다. 이 같은 판단에 비추어볼 때,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많지 않은 대다수의 民이라는 뜻으로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크게 무리는 없을 듯 하다.

[5] 위의 책, p.170.

[6] 龍潭遺詞, 龍潭歌, 신복룡 『한국정치사상사』(1997)에서 재인용.

[7] 김만규, 『한국의 정치사상』, 현문사, 1997, p.348.

[8] 東經大全, 『한국정치사상사』, p.316에서 재인용.

[9] 신복룡,『한국정치사상사』, 나남출판, 1997, p.336 참고.

[10] 박명규, 『한국 근대 국가 형성과 농민』, 문학과지성사, 1997, p.183.

[11] 위의 책, p.181.

[12] 교조신원운동이란 국가로 하여금 동학의 포교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하고, 최시형에 대한 탄압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동학교도의 운동으로서 총 3회에 걸쳐서 일어났다.

[13] 위의 책, p.179.

[14] 신복룡,「한국 지역감정의 역사적 배경」,『한국정치사상사』, 나남출판, 1997.에 호남차별의 역사에 관한 자세한 정보들이 있음.

[15] 위의 책, p. 188.

[16] 노태구, 『동학혁명의 연구』, 백산서당, 1981, p.37~39.

[17] 위의 책, p.45.

[18]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쓰였다.

[19] 특히 봉건제에 관한 생각들은 대부분 도올 김용옥의 견해에 따른 것임을 밝힌다. 하지만, 그의 텍스트 어디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기억하기 어렵다. 적어도 그는 대단히 많은 책에서 봉건성이라는 문제를 언급했으며, 심지어 EBS 노자와 21세기 강의에서도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가상의 사회주의자에 관한 추리는 그야말로 가상의 추리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우리가 왜 봉건성이라는 단어를 의심도 없이 남용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20] 마루야마 마사오,『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p.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