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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킴/경제지리학2012

Harvey 이론의 새로운 조명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비(Harvey)도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예를 들어 하비는 2005년 저서에서 미국이 경제위기를 겪게 될 것임을 예측했다. 이 예측은 비관적 패러다임에서 나온 예측이라기보다는 <자본의 한계>에서 보여준 자신의 논리에 근거한 예측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불거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하비의 예측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미국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던 것과 달리, 미국 경제는 파생상품과 증권화로 인해서 오히려 뼛속 깊이 부실했던 것이다. 게다가 2012년이 시작된 지금도 세계 경제체제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까지 나오면서,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대공황에 준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하비의 예측이 적중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평가하는자가 마르크스주의자일리는 없다. 하비 역시 마르크스주의자인 이상, 그의 분석이 어떤 경로로 전개되었든지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 예측을 했을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어둠의 경제학자인 루비니나 미네르바 박대성의 에측이나, 하비의 예측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셋의 방법론은 다르지만, 나름의 방법론을 통해서 위기를 예측해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이 가장 과학적이라고 말하기도 머쓱하다. 그렇다면, 루비니나 미네르바의 예측은 왜 과학적이 아닌가? 또한, 많은 사회주의자의 예견과 다르게 1950-60년대 서구 자본주의가 호황을 맞았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조절론 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반주변부 포스트포디즘 경제체제라고 한다. 어떻든 반주변부의 발전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나는 선대의 학자들로부터 지겹도록 하비의 논의를 들어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또,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도 하비의 저작을 접한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나마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읽은 사람은 조금 있지만, <자본의 한계>를 읽은 사람은 찾기 쉽지 않다. 우리 쪽의 전공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하비를 많이 읽고, 다른 쪽 전공에 있는 사람들은 하비를 너무나 읽지 않는다. 하물며, 자칭 경제지리를 전공한다는 사람들도 하비나 정치경제학쪽의 이론에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반주변부 포스트포디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비에 대한 기이한 불균형은 하비의 이론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하비의 마르크스주의 접근은 결국 이론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론이 실천가능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비의 이론이 꼭 실천을 위한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이 하비를 이론적으로 소비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중요성을 역설해왔던 것에 비해서 얼마나 한국사회에 울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막말로, 한국의 토건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하비의 "건조환경", "탈취에 의한 축적", "축적의 위기", "시간에 의한 공간의 소멸" 등 그럴듯한 워딩을 가져온 것 이상의 실질적 의미를 적어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론적으로 하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서는 하비의 이론이 지나치게 구조주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하비의 정치경제 논리는 지나치게 기계적인 측면이 있다. 이론이 매끄러워질수록 불편한 일반화 역시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또, 어떤 이가 보기에는 하비의 결론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들의 사회운동은 르페브르 말마따나 재현적 공간을 생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의 공간"에 대한 주문은 여전히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모든 비판은 사실 하비의 이론을 이용해 논문이나 책을 쓰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조금 더 구조주의적이면 어떻고, 조금 더 포스트하면 어떤가?  그로 인해서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하비가 중국을 "특수한 신자유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에 경악했다. 중국만큼 국가의 힘이 강한 나라도 신자유주의라면,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다보니 2008년 금융위기 역시 신자유주의가 더 깊어지는 과정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를 나이브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저항하기 더 힘들어진다. 다행히도, 나는 하비가 중국을 '신자유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이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에 대해 가지는 부채의식의 산물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비의 설명이 더이상 정교한 정치경제학적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운동과 선동의 언어로 약간씩 변화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중국에 대한 하비의 진단은 최소한 부정확하거나, 대체로 이상하다. 

하비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남아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실천가가 아닌 이론가로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천착하는 학자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모두에서 이제 정통마르크스주의자를 찾기란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하비는 어쩌면 기념비적인 지식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하비의 세대가 지나면, 지리학 내에서는 물론 사회과학 전반에서 마르크스가 가진 영향력이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도 괜찮다고 본다. 그동안 우리는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그늘에 너무 오래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