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끔문화예술평론/영화평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엄정화는 왜?



결혼은, 미친짓이다 (2002)

Marriage Is a Crazy Thing 
7.6
감독
유하
출연
감우성, 엄정화, 박원상, 강소정, 윤예리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03 분 | 2002-04-26
글쓴이 평점  


이 영화만큼 원래의 뜻이 많이 왜곡된 영화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유하 감독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한 영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제목 중간에 건방지게 찍혀있는 쉼표(,)를 보라!


질펀한 연애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유하의 영화를 절대 흘려볼 수 없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의 묘한 매력을 가진 감우성, 갓 30대를 넘긴 세련된 여우의 대명사 엄정화. 이들이 보여주는 연인들의 '진짜' 삶. 진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흘러가는 영상에 매몰되는 것만 가지고는 곤란하다. 애인과 둘이 조그마한 방에서 누워 며칠을 지낸 다음에 느껴지는 이유없는 미움과 질투, 그리고 애틋한 감정을 모두 느껴보지 않고서는 영화가 주는 묘한 느낌을 잡아낼 수 없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영화에 대한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보자.

 

 이 영화를 두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영상화"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은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유하처럼 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이 제목에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내걸었을 리가 없다. 이 영화의 묘미는 결혼을 앞둔 남녀의 이야기이다. 즉, 영화는 30대의 연애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시트콤이나 드라마, 혹은 여타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애의 장면은 수많은 남녀의 '진짜' 연애와는 별 관련이 없다. 매일매일 그녀를 위한 폭죽이 터지고, 고급쇼핑몰에 데려가 비싼 옷을 사주고, 한강이 보이는 멋진 식당에서 촛불을 켜고 와인을 쩝쩝거리고, 와인을 마시다가 여자가 미친듯이 키스를 퍼붓고,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남자가 멋진 아침 식탁을 차려놓고 등등.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녀 커플 중에서 이 중 하나도 못해본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렇다. 진짜들의 삶은 그렇지가 않다. 30대 중반의 시간강사의 어머니는 여자만 보면 며느리감인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진짜 연애는 해보고 싶은데 나이가 차서 결혼도 해야겠고, 그렇다고 애라 모르겠다 아무나 잡아서 결혼하자고 하기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다. 이런 남자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란, 먹물을 먹은 사람 답게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애써 결혼을 미루어버리는 것. 그래서 감우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나 나나 열 네살 이후로 누군가를 계속 좋아해왔어. 그런데 평생 한 사람만 보고 사는게 가능할 거 같아?"

 

 엄정화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2주동안 감우성은 다시 지독한 그리움과 번민에 시달린다. 왜? 엄정화가 만약 나타난다고 해도 그녀와 결혼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엄정화는 쿨한 컨셉을 유지하지만, 그녀는 가난을 딛고 감우성과 결혼할 마음가짐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던 것 같다. 의사와 결혼을 하기 전에 감우성을 찾아와 침대 위에서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물어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좁혀진 의사와 감우성. 감우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한다. "의사랑 결혼하라"고. 둘의 의사전달은 미묘하게 어긋난 것이다. 둘 다 서로와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데, 감우성은 결혼할 자신이 없었고, 엄정화는 감우성에게 "나랑 결혼하자"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담배 한모금.

 

 다시금 말하지만, 이건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정화가 마련해준 집에서 감우성은 이유없는 자괴감에 빠지고, 가벼운 우울증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엄정화는 감우성의 자취방에 꿈꾸던 아기자기한 신혼방을 마련해놓고, 지루한 결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감우성은 엄정화의 귓볼에서 간간이 풍겨나오는 남자의 향수냄새를 맡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신혼방이 환상의 세계라는 것을 이따금씩 눈치챈다. 이 같은 모순이 작열하는 부분은 바로 감우성과 엄정화가 콩나물비빔밥을 가지고 싸우는 장면이다. 엄정화는 콩나물을 사서 다듬고, 정성스럽게 비빔밥을 준비한다. 기대. 알콩달콩, "자기가 해준 비빔밥이 최고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으리라. 이미 엄정화와의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눈치챈 감우성은 라면을 끓임으로써 자신을 현실세계에 위치시킨다. 엄정화가 말한다.

 

"진짜 라면 먹을꺼야?"

 

 감우성은 양철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무책임하게 식탁으로 옮겨 놓는다. 엄정화는 으름장을 놓는다. "그거 먹기만 해." 라면과 콩나물 비빔밥의 모순은 단순히 음식개체의 성격의 차이로 설명되기 어렵다. 자취생에게 라면은 생명이요, 풍성한 만찬이다. 단돈 600원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도록 신이 선물해준 최고의 축복이다. 자취생에게 라면은 아내이며 친구이고, 하늘이자 신이다. 콩나물 비빔밥이라는 음식은 남자가 혼자 집에서 절대 해먹을 수 없다. 아니, 보통의 남자들은 절대 혼자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따위의 수고는 하지 않는다. 콩나물 비빔밥은 엄정화가 있을 때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지만, 일종의 환상이다. 감우성 혼자 집에 있을 때에는 절대 먹을 수 없는 특별식이다. 극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감우성이 라면을 한 젓가락 치켜올린다. 입김을 분다. 후~ 그리고 엄정화의 얼굴이 잠시 스크린에 비춰진다. 걱정스러운 눈빛. 그 다음 감우성은 한 젓가락 물린 라면면발을 먹어버리고 만다. 엄정화가 소리를 지른다. "나 혼자 이걸 다 먹으란 말이야?" 감우성은 이리저리 눈빛을 홀기다가 젓가락을 확 던진다. 젓가락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한 씬이 끝난다. 이 극적인 상황에서 왜 엄정화는 콩나물 비빔밥의 양(quantity)를 문제삼았을까? 일단 콩나물비빔밥은 같이 먹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공동체적 음식이다. 반면 라면은 혼자도 먹고, 여럿이도 먹는 하이브리드적인 음식이다. 감우성이 라면을 한 젓가락 입에 오물거리는 동안, 엄정화가 만든 환상의 공동체는 심각한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둘의 마지막 베드신.

 

 영화를 주의깊게 본 사람이라면 엄정화가 옷을 다 벗고 찍은 베드신은 맨 마지막의 베드신 하나라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1시간쯤 전에 엄정화가 했던 대사를 기억하라. "옷을 다 벗고 있으면 고깃덩어리 같아." 마지막 베드신에서 엄정화는 스스로 고기덩어리이기를 표방하면서 감우성을 잊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영화는 엄정화가 그들의 '신혼방'을 찾는 것으로 끝나니까.

 

 이 영화는 30대 중반, 혹은 후반의 남자가 겪는 복잡한 심정을 다룬 영화이다. 대게 유하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이 영화에서도 엄정화의 캐릭터는 섬세하지가 못하다.(비열한 거리에서의 이보영,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의 한가인보다는 훌륭하지만) 대신 이 남자는 나레이션까지 곁들여 자신의 섬세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선사해준다. 처음 내가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겨우 스물둘. 나는 이 영화가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줄 알았더니 연애이야기네!"라면서 실랄하게 비판한다. 스물 일곱의 나. 불면증과 불면증이 선물한 여백인 시간, 그리고 불면증을 먹고사는 케이블티비 덕분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몇번이나 곱씹어 본다. 질펀하고, 격동적인 기억들이 모두 지나간 지금,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안심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진짜" 사람들이 겪는 연애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겪는 격정과 혼란, 결혼에 대한 갈망과 회의가 나 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아늑해진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나요? 아래의 View-on 상자를 눌러주시면 큰 도움이 됩니다. 의견 남겨주시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